9월 19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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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이 일을 증언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요21:24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이 일을 증언하고

여러분,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는 것이 쉽습니까? 쉽지 않습니까? 오래 전 일인데 어떤 사람이 법정에 증인으로 서서 증언을 하고 나오다가 조폭의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 그 이후 검찰에서 증인 신청을 해도 기피하는 사람이 증가했다고 합니다.

법정에 증인으로 출두할 때, 판사가 “당신의 생각은 어떠합니까?”라고 묻지 않습니다. 오직 들었느냐, 보았느냐 하고 경험을 묻습니다. 그러므로 직접 보고 들은 경험이 없는 자는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와같이 복음에 대한 증인이 될 때도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1경험적이어야 합니다.

어떤 논리적인 이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직접 보고 들었다는 목격자적인 경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2증거 하려고 하는 그 사람을 사랑해야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보고 들었어도 증거로 보호하려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증인이 되고자 하는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에 귀찮게 보았고 들었다고 증언하여 가해자에게 미움을 받고, 심하면 가해자로부터 복수를 당하겠습니다. 내가 증거 함으로 인하여 어떠한 피해가 온다고 해도 다 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증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위해서 증거하는 그 분을 극진히 사랑해야 합니다.

이단 전문가이신 탁명환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교수님의 조사에 의하면 이단 종교임이 확실한데, 증인들이 창피하다고 법정에 나오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증인의 육성을 녹음까지 하고 책에도 이미 발표했는데도, 법정에 나올 것을 거부하며, 녹음된 것을 지워 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증거가 사실인데도 증언을 하지 않겠다는 것 때문에 탁 교수는 위증한 것이 되어 벌금을 내고 사과문도 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증거가 사실이라도 이렇게 되면, 그 증거는 묵살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증인이 되려면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3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위하여 증거하는 사람과 함께 공동 운명에 들어갈 만큼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증거하는 데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합니다. 희생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이 희생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한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고서는 이렇게 힘든 일에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증인이 되어 달라고, 전도하라고 부탁하시는 것입니다. 본다고 다 아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하며, 믿는다고 다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야 하고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핍박 속에서도 증인으로 순교했고, 사도 요한은 증인으로서 이것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제자 중에서 이 세상에 가장 오래 남아 증거하는 자로서 일생을 마치며, 요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이제 요한복음의 기록이 다 끝나 갑니다. 그러나 더하고 싶은 한 마디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증언이 “참이다”라는 말입니다.

"이 일을 증언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요21:24

요한이 요한복음에 기록한 내용들이 모두 진실 되고 참되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요한복음이 성경 속에 포함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가 요한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야 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말을 잘하는 사람도 자기가 하는 말을 상대방에게 전달하고자 할 때에, 17%만 전달할 수 있으면 성공이라고 합니다. 서로 맞장구를 치면서 말을 했다 해도 완전하게 이해되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결코 내가 가진 생각을 다 말할 수 없으며, 상대방도 내 말을 다 알아듣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오해한 예가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요21:21-23

무슨 말씀입니까? 요한을 내가 올 때까지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주님의 이 말씀이 세월이 흘러가면서 형제들 사이에 엉뚱하게 와전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형제들이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라 초대 교회의 교인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마가의 다락방에서 초대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곳의 교인들은 한 분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란 의미에서 서로 형제자매로 불렀습니다. 그때는 아직까지 신약성경이 다 기록되기 전이었는데, 세월이 흘러가면서 교인들 사이에서는 엉뚱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나시던 새벽, 주님께서 요한에게 너는 죽지 않는다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셨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복음의 말미에서 교정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생각해 보십시오. 초대교인들 사이에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죽지 않겠다 말씀하셨다는 헛소문이 퍼졌을 때, 도대체 어떤 현상이 벌어졌을 것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교인들은 죽지 않을 것이라 믿는 요한을 마치 우상을 섬기듯 하려 했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눈앞에 있는 불사조 요한의 말을 더 중요시했을 것입니다. 요한이 아닌 다른 사도들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요한과 주님의 관계, 요한과 사람의 관계는 심각하게 뒤틀려 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떠나, 그릇되고 거짓된 공허한 말이 판을 치는 교회는 결코 주님의 교회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주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라 진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입에서 매일 쉬임없이 발해지고 있는 그 숱한 말들이 얼마나 참되고 진실 됩니까? 콜라 속에 치아를 넣어 두면 녹아 없어진다는 것처럼,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을 마치 자신이 직접 확인해 본 것처럼 퍼트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본문 속의 교인들처럼, 주님의 이름으로 거짓된 것을 믿고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참된 주님의 교회일 수는 없습니다.

한평생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주님을 위한다고 열심히 말하며 살다가 주님 앞에 섰을 때, 나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고, 너의 말은 모두 거짓되다고, 나는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한 것이라고 주님에 의해 전면 부정 당한다면, 그보다 더 낭패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요한처럼 우리의 말을 늘 스스로 점검하는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본문 24절 하반절에 요한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여기에서 `우리'란 좁게는 요한 자신을 포함한 초대교회의 교인들을 의미할 수도 있고, 넓게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요한복음을 읽게 될 모든 사람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고 표현함으로서 요한이 자기 자신을 객관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3자의 시각에서 자신의 모든 증언이 참됨을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요한이 자신을 객관화시켜 자신의 참됨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4복음서의 마지막장인 요한복음 21장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주제― 즉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 형제 사랑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면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사랑으로 늘 자신을 객관화시키며 살아갈 때 요한의 모든 증언은 그릇되거나 거짓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자신을 객관화시켜 보십시다. 제3자의 입장에서 우리 자신을 사랑의 잣대로 냉정하게 평가해 보십시다. 우리는 정녕 우리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형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참된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말은 참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진리 안에 거하는 자만 주님과 사람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으며, 그때 우리의 입 속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은 주님과 사람을 향한 사랑의 언어, 참된 말들이 될 것입니다. 사랑은 진리요, 진리의 또 다른 이름이 사랑인 까닭입니다.

우리 또한 요한처럼 중단 없이 자신을 객관화시키며, 우리가 주고받는 모든 말들이 참된 말이 되게 해 달라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말이 사람과의 관계를 뒤틀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뒤틀린 관계를 회복시키는 생명의 언어들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말이 신뢰를 상실하여 총체적으로 불신의 사회가 된 이 시대에 참된 말을 행하므로 언어의 신뢰성을 되세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 구사력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기록에서도 중요한 것은 문장력이 뛰어나서 잘 기록했느냐가 아니라 진실입니다.

요한은 요일1:1장에서도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사람이 가진 오관을 다 동원해서 확인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눈으로 그냥 본 것이 아니라, 주목해서 보았고, 그것도 모자라 만져도 보았으니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자기의 최선을 다해서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이상 어떻게 알아보겠습니까?

그런데, 요한이 여기서 말하지 않은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자기가 보고 듣고 확인한 사실을 믿고 그 사건에 자기의 생명을 바쳤다는 말이 없습니다. 요한이 생명을 걸고 복음을 증거하다가 순교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교만해질까 두려워서 빼놓은 것 같습니다. 요한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11제자 모두 그들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부활이 분명하니 생명을 바쳤고, 기적이 분명하니 뛰어들었으며, 진리가 분명하니 두려움이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 복음은 요한의 생애 가운데서 확실하게 경험한 바를 말하는 것으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전하여 준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본 것이요, 내가 경험한 것이므로, 남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증언을 제발 믿어 달라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니 안되니 하지 말고, 과학적으로 맞는 이야기다 아니다 하지 말고, 2천년 전의 이야기니 모르겠다고 하지 말고, 기록한 그대로 믿어 달라는 것입니다.

목격하지도 못한 사실, 과거에 일어났던 사실, 인간의 이성과 감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을 믿는 것처럼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 믿어 달라는 말처럼 답답한 말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믿으면 구원을 얻는 이 진리가 참인 것을 제발 믿어 달라고 끝까지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2022년 9월 20일 오전 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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