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6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요21:20-22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사도 요한)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요21:20-21이 말씀의 바로 앞 절인 19절 하반절을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런데 베드로는 엉뚱한데 신경을 씁니다.
지금 베드로는 무엇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까? 주님을 따르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옆에 있는 요한에 대하여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 이 요한은 어떻게 될까요?”
그러자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요21:22이 말이 나중에 오해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요21:23예수님이 왜 오해를 일으킬만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왜 이런 내용을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기록하였을까요?
요한복음은 예수님과 관련된 내용이라면 아무것이나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20:30-31그렇다면 이 본문이 주는 교훈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사명을 회복하려면 제거 받아야 할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였던 일입니다.
낙심, 실패에 대한 치유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용서와 예수님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 고백으로 해결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에게는 해결 받아야 할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도로 귀하게 쓰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 받아야 할 문제가 있었는데 이것이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름은 반석이지만 아직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끝까지 예수님만 바라보지 못하고 자꾸 주위를 둘러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다가 그만 다른 사람을 보거나 환경을 보면서 무너져버리는 일이 베드로에게 있었습니다.
오늘 이 문제를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다루시면서 해결해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갈 것을 예언하셨는데, 베드로가 말하기를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니다” (막 14:29) 고백했습니다. 그냥 “선생님, 저는 안 버릴께요.” 그렇게 말하면 괜찮을텐데 “여기 있는 요한은 버려도, 안드레는 버려도, 나는 안 버립니다.” 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평소에도 다른 제자들에게 신경을 많이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요한에 대하여 그랬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가 대화할 때, 베드로의 눈에 요한이 들어왔습니다. 그 요한은 베드로에게도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였고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 였습니다. 평소에 사이가 나쁜 관계는 아니었지만 베드로 마음에 은근히 신경이 쓰이던 제자, 경쟁 상대였던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였을 때, 요한은 끝까지 주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순간에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그 현장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 요한과 비교할 때 베드로는 자신이 너무 초라해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순교할 때, 요한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물었는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것이 베드로의 약점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끝까지 예수님만 바라보지 않고 이처럼 주위를 바라볼 때는 언제나 무너졌었습니다.
베드로가 풍랑이 이는 바다 위를 걸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바람을 바라보는 순간, 두려움이 일어나 바다 속에 빠졌었습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마14:30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때도 그랬습니다. 끝까지 예수님만 바라보지 못하고 계집종 하나가 던진 질문 “당신, 예수의 제자이지요?”에 두려움이 확 밀려오면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가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또 옆 사람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한눈팔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 그토록 엄히 베드로를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을 쳐다보느냐? 내가 재림해 올 때까지 요한을 편안하게 살게 한다면, 나를 따르기를 그만두겠다는 말이냐? 왜 이 중요한 순간에 다른 사람을 바라보니? 요한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네 사명의 길이 달라지느냐? 그가 네게 무슨 상관이냐?”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특히 이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신 것은 잠시 후면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성령님을 보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눈으로 보면서도 이처럼 마음이 흔들린다면, 눈에 보이지 않을 때는 어떻겠느냐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스데반이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이 이 말(스데반의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7:54-55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한눈을 팔게 되면,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면 반드시 시험에 듭니다.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두 다 그렇습니다.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되고,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삼상18:7-9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비교하는 순간, 자신이 초라해 보이고 때로 자기 파괴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더 큰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마음에 원망, 질투, 비난, 교만, 낙심이 왔다면 예수님만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만 바라보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여호사밧 왕이 모압, 암몬, 세일산 거민의 연합군의 침략을 받았을 때 승리한 비결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유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아내와 자녀와 어린이와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
대하20:12-12"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그들에게로 내려가라 그들이 시스 고개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그들을 만나려니와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대하20:15-17웨슬리 목사님이 여섯 살 때 그가 살던 집에 불이 났습니다. 가족 모두 급하게 집에서 빠져 나왔는데 어린 웨슬리가 2층에서 자고 있다가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달려가서 창문에서 살려달라고 외치는 웨슬리를 간신히 구출해냈는데 그 직후에 불탄 집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평생 이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의 어머니 수잔나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네게 큰일을 시키려고 그 무서운 불길에서 너를 건져내셨다’
웨슬리 목사님이 50세 때에 심한 병에 걸려서 죽을 뻔했을 때 자기 비석에 새길 글을 스스로 적어 놓았는데, 사람들이 자기에 대하여 찬사를 늘어놓을까 봐 “여기에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존 웨슬리의 육신이 누워 있다.”라고 적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이 그때 돌아가셨다면 이 말의 그의 비문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 웨슬리 목사님을 회복시켜서 40년 가까이 더 일하게 하셨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의 여든여섯 살 때의 일기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지금이 내가 80년 전에 화마에서 구출된 그날, 그 시간이다. 나는 잠시 일손을 멈추고 그 놀라운 섭리에 대하여 잠시 기도드렸다. 찬양과 감사의 음성이 하늘로 치솟았고 주님 앞에서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았다.”
웨슬리는 하나님이 교회를 새롭게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을 사용하기 위해서 여섯 살 때 죽어야 할 자기를 화재에서 구해 주셨다고 분명히 믿었기에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과 나만 생각하면 시험 될 것이 없습니다.
불평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은혜를 작게 받았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부족하게 받았습니까?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 대속의 피를 흘려주신 은혜를 여기 있는 우리 중에 못 받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그 사랑을 못 받은 사람이 여기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는데 바로 데려가시지 않은 것은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 사명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십자가의 은혜, 완전하신 사랑에 감사할 뿐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귀한 사명까지 주셨으니 찬양할 뿐입니다.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순간에 내 속이 뒤집힙니다. 감사가 불만이 되고 기쁨이 불평이 됩니다.
남과 비교하는 자는
① 아무리 가져도 영원히 만족함이 없습니다.
② 축복을 받아도 누리지를 못합니다.
③ 불필요한 열등감에 계속 고통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 제일 큰 시험은 자꾸만 남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남하고 비교하면 자기 일을 못합니다. 남과 비교하다보면 감사하기보다 원망하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마20장에 포도원 품군의 비유가 나옵니다. 9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오후 3시, 5시에 온 사람, 전부 똑같은 품삯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온 사람이 불평했던 까닭이 무엇입니까? 남하고 비교하니까 불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할 곳이 없는 그 시대에 일자리를 준 것도 감사하고, 품삯을 정당하게 당일에 준 것도 감사하지 않습니까? 계약한 대로 받았으니 감사하면 되는데, 다른 사람과 비교하니까 원망과 불평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베드로는 유대 사람에게, 바울은 이방 사람에게 각각 맡은 바가 다릅니다.
야고보는 교회가 설립되자마자 첫 번째로 순교했습니다. 죄가 많아서 먼저 죽었다고 말하겠습니까? 제자 중에서 순교 제 1호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다른 사람들의 일에 간섭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면 되고, 어떤 사람은 음악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지식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봉사로 하나님을 섬기면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저것 따질 것이 아니라 있는 자리에게 자기에게 맡겨진 본분에 충성을 다하면 됩니다.
어느 것이 더 복된 것이고 어느 것이 덜 복된 것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 사명이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내 형편대로 주님을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