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5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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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요21:18-19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어떤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 서울에서 공부했습니다. 명문대학을 졸업한 후에 신학대학원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후에 훌륭한 목사님 밑에서 목회 훈련을 받았습니다. 부목사로 섬기면서 ‘하나님, 저를 담임목사로 청빙하는 교회가 있으면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조건을 따지지 않고 가서 열심히 섬기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이력서를 내지도 않았는데 부산에 있는 조그만 교회에서 담임 목사로 청빙을 했습니다. 서울을 떠난다고 한 번도 생각해 본적도 없는데 대전 정도의 거리도 아니고 부산에서 청빙이 온 것입니다. 고민을 하면서 선배 목사님들을 찾아다니며 상담을 했습니다.

12명의 선배 목사님들을 만나 상담을 했는데 한결같이 내려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방에서 목회를 하다가 서울로 올라오는데 너는 뭐가 부족해서 부산으로 내려가느냐고 반대했습니다. 담임 목사님께서도 조금 더 기다리면 서울의 좋은 교회에서 청빙될 것이니 그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 목사님의 아버님은 장로님이셨습니다. 북한에서 7남매를 낳았는데 6·25때 서울에 며칠 다녀오겠다고 집을 나선 것이 가족들과 생이별이 되었습니다. 남한에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아버지 장로님이 70세가 넘으셨는데 가서 자초지종을 말씀 드렸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 장로님의 얼굴이 굳어지면서 ‘김 목사, 무릎 굻고 앉거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아버지 장로님이 얼굴을 굳히면서 무릎을 굻으라고 하는 말에 목사님은 엉겁결에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아버지 장로님이 흐느껴 우시면서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오늘처럼 슬프고 허탈한 적이 없었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이북에 가족을 두고 내려와 생이별을 한 것 보다 더 슬프다고 말씀하시더라는 겁니다.

북한의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남한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고 살면서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하나님께 계속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남한에서 얻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드려 목회를 하게 하는 것이 살아야 할 이유라고 생각하고 아들을 목사로 만든 기쁨이 무엇보다도 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들이 목사 안수를 받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어느 교회든지 처음으로 청빙하는 교회가 있으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알고 가겠다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자랑스러웠고 신실한 목사가 되겠다는 희망을 가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담임 목사로 청빙하는 교회가 있는데 이것저것을 재면서 고민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실망감과 허탈감이 들었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왜 기도했느냐고 꾸중하셨습니다. 청빙하는 교회가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 선배 목사들을 찾아다니며 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묻고 다니는 아들 목사의 모습이 한심하다는 것입니다.

통곡하듯이 흐느껴 우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회개하고는 그 자리에서 부산에 있는 교회에 가겠다고 결정을 했습니다. 부산에서 20여 년 동안 목회를 잘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겠다고 기도해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순종이라는 단어에는 내 뜻과 생각을 내려놓는 것이 전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실패했던 베드로를 다시 부르셔서 그를 회복시키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다시 사명자로 부르시면서 ‘네가 젊었을 때는 스스로 띠를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네팔을 버리리니 남이 네게 띠를 띠우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는 네가 나를 따른다고 말을 하면서도 하고 싶으면 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았다. 가고 싶으면 가고, 가고 싶지 않으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다른 사람들이 네게 띠를 띠우고 네가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하게하고, 원하지 않는 길을 가게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 사도 요한이 해석을 합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순교)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라” (요21:19)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로마에서 순교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순교하게 되자 “나는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한 사람인데 어찌 그대로 달릴 수 있습니까? 거꾸로 메달아 주십시오.”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십자가 죽음은 베드로가 원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하신 말씀이 응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젊었을 때에는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신앙 경륜이 깊어지자 자신이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려가서 순교를 하였습니다.

신앙이 어린 사람의 특징은 자신이 원하는 것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깊어지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것에 순종하게 됩니다.

내가 원치 않는 일을 하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26:39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십자가를 지는 것인 줄을 알았지만 순종이 어려워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귀하게 사용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15:31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5:24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보면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요21:9을

이는 지금 당장 순교 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가자는 말씀이었습니다. 같은 방향, 같은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자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를 향해 살아가자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16:24

다른 한 가지의 의미는 나를 닮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1:3-5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11:1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4:19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8-29

팔레스타인 지역은 농사를 지을 때 소가 쟁기를 끕니다. 한국에서는 한 마리가 쟁기를 끄는데, 팔레스타인에는 두 마리 소가 함께 멍에를 메고 쟁기를 끕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멍에는 짐승 두 마리를 넣을 수 있게 한 세트에 두 개의 구멍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쟁기를 끄는 어미 소 옆에 새끼소가 따라 갑니다. 얼핏보면 두 마리가 함께 일하는 것 같지만 멍에의 모든 무거운 것은 어미 소가 다 지고 새끼소는 옆에서 멍에를 메고 밭을 가는 과정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심은 어미 소와 같이 멍에를 메고 앞장 설 것이니 내 곁에는 나를 따르며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예수님을 잘 배울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배우고 닮아가려면 예수님 곁에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따르며 그 분의 생각과 마음과 성품을 배우며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며 그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마음과 성품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화와 조화의 차이를 아십니까? 제가 어릴 때에는 조화 값이 생화보다 쌌는데, 요즘은 조화가 생화보다 비싸다고 합니다. 요즘은 조화를 생화보다 더 아름답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조화에는 향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조화 안에 향수를 넣어 향기를 낸다는 것입니다. 감각으로는 생화와 조화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생화와 조화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조화는 수정이 되지 않습니다. 생명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외식하는 신앙과 신실한 신앙, 죽은 신앙과 산 신앙을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예배하는 모습, 봉사하는 모습, 직분자의 모습을 겉에서 보면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속으로 들어가 살펴보면 생명력이 없는 조화와 같은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의 생명력, 믿음의 영향력이 없습니다. 소금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짠 맛이 없습니다. 빛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어둠을 밝히지 못합니다. 조화와 같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부모, 예수님을 믿는 직분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가까이 가면 갈수록 예수님의 향기가 나야 합니다. 믿음의 부모는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와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부모는 믿음의 부모다워야 합니다. 목사가 목사다워야 하고, 장로가 장로다워야 하고, 권사가 권사다워야 하고, 믿음의 사람이 믿음의 사람다워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아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겨야 합니다. ‘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마음과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아버지 장로님이 아들 목사를 향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어리석어 보이고, 손해가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을 믿기에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 결단 이후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세계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도 예수님을 우리를 향해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믿고, 그 분을 배우고 닮아 생명의 향기를 만들어 가는 주의 귀한 백성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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