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5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20:30-31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말씀을 혀를 통하여 공기를 진동시키는 언어로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전체가 다 말씀입니다. 쓰다듬는 것도 사랑의 표현이고, 쥐어박는 것도 사랑의 표현이 됩니다. 이것이 다 말씀이요, 신호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내가 눈으로 본 바요, 귀로 들은 바요, 손으로 만진 바라”고 말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1:1반드시 귀로 들리는 것만이 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이란 논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직감적인 것도 있고, 몸에 부딪혀서 깨닫는 것도 있습니다. 천지는 말씀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 귀중한 말씀이 인격입니다.
말씀은 대자연을 통해서 보여 주는 것도 좋고, 귀로 들리는 소리도 좋고, 바람소리도 좋고, 공중에 나는 새를 보는 것도 좋지만, 예수님을 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음성을 듣는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의 관계를 가지는 것 이상으로 더 좋은 것이 있겠습니까?
말씀의 결정적인 상징, 즉 가장 중요한 상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사도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인격으로 말하면 침묵도 말씀입니다. 때에 따라 예수님은 참 어려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하에 보면, 수로보니게 여자가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자기 딸에게 흉악한 귀신이 들렸으니 고쳐달라고 소리소리 질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도 여인은 계속해서 소리치며 따라옵니다. 침묵도 대답입니다. 똑똑한 사람은 침묵 속에서도 음성을 듣습니다."
마7:24침묵을 말씀으로 들을 줄 모르는 자는 미련한 자입니다. 때로는 침묵이 웅변보다 더 나은 말씀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인격으로부터의 언어를 바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친히 말씀하신 것만 말씀이 아니라, 병 고치신 것도 말씀이요, 어루만지신 것도 말씀이요, 걸어가신 것도 말씀이요, 침묵하신 것도 말씀으로, 33년 동안 행동하신 그 모두가 우리에게 향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으로 오셨고, 인격으로 오셔서 우리 인간과의 관계를 대화의 관계로 맺어 주심에 감사합니다만, 많은 장벽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것은 언어의 장벽이요, 문화의 장벽이며, 시간의 장벽이요, 공간의 장벽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게 되어, 여기에 계시면 저기에는 안 계십니다. 동시에 많은 사람을 만나실 수 없습니다.
또한 히브리말로 말씀하시니 애굽 사람이 알아들지 못합니다. 만약, 한국 사람인 우리가 거기에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역사할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여기에 증거라는 길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보았고, 그것을 다음 사람에게 증거 합니다.
“우리가 만나보니 예수는 이런 사람이다. 물 위를 걷기도 하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도 하셨다”라고 자기들이 눈으로 본대로 열심히 증거 합니다. 그러면, 이 증거를 듣고 다음사람에게 또 전합니다.
증거는 어떻게 전해집니까? 증거는 두 가지로 전해지는데, 하나는 전승이요 또 하나는 기록입니다.
전승은 말로 전하는 것으로, 사도 요한이 다음 사람에게 전하고, 그 사람이 또 다음 사람에게 말하고, 또 다음 이렇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전승이랑 무섭도록 크게 효과가 있습니다. 그런데, 전승은 실감이 나지 않는 단점이 있습니다. 처음 직접 본 사람이 전할 때는 실감이 나고 좋은 데, 몇 사람 건너가다 보면 어디까지가 참말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말이란 시간이 갈수록 보태지기도 하고 감해지기도 해서 나중에는 아주 다른 말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승의 결정적인 약점입니다.
처음에는 인격을 통해서 전해지고 설명된다는 입장에서 대단히 좋습니다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처음 초대교회 시절에는 기록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기록이 있어도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마가복음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실제로 베드로가 살아있는데 마가복음을 보겠습니까? 베드로의 말씀을 듣겠습니까? 그 당시의 이야기를 베드로로부터 들으면 더욱 실감이 나지 않겠습니까? 기록한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는 아무래도 그에게 직접 듣는 것이 생생하고 좋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전승으로만 충분했기에 기록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사도들이 하나씩 둘씩 죽어가니 급해졌습니다. 드디어 사도 요한만 남게 되자, 그의 제자들이 찾아가서 부탁을 합니다. “이제 선생님마저 가신다면 예수님의 제자는 없습니다. 제발 기록으로 남겨 주십시오”하고 부탁을 해서 쓴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다 기록된 후 마지막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을 다 읽어보고, 그 의미를 해석하려는 의도에서 썼으며, 보충적인 의미가 있고, 변증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이제 본문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20:30-31)
이 책에 기록한 것 외에도 표적이 많다고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행적은 사실 많을 것입니다. 불과 며칠 동안에만 되어진 일도 많을텐데, 3년 동안 행하신 이적을 일일이 다 쓴다면 정말 많은 분량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무슨 병을 어디서 어떻게 고쳤다고 하는 것을 기록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복음서에서는 기적이 40회 이상이나 있지만, 요한복음에는 7가지만 선발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예수님 생애 전부를 기록하려고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은 예수님의 행적의 의미를 중시해서 몇 가지만 선발해서 기록했고, 또한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적에 도달하도록 표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본문에 나타난 대로 두 가지의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를 믿게 하고 또 하나는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첫째, 예수를 믿게 하는 책으로써 예수님이 주인이십니다.
신구약 어디를 보나 그리스도가 중심적입니다. 이단의 특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그 중에 제일 표가 나는 것은 예수님이 중심이 아닙니다. 깊이 들어가 보면, 예수님 대신이 자기가 들어가 있습니다.
이단은 성경에서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성경은 어디까지나 중심이 예수이므로 창세기에서부터 요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어디서나 예수를 보아야 합니다.
구약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제사 이야기가 많습니다. 특히, 레위기에 있는 피의 제사는 십자가를 설명하는 것인데, 십자가 없이 이 제사를 보면 도살장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레위기는 십자가를 설명하는 책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중심으로 보되, 어떤 예수님으로 보아야 합니까? 본문에 기록된 대로,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역사적인 인물인데,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예로부터 목마르게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고 지금도 계속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이 오셨다고 믿습니다. 2천년 전에 오신 메시야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설명하는 것이 성경의 주제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모두가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음, 믿게 하려 한다는 말은 역사적 사건을 신앙 사건으로 바꾸어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실제로 있는 사건이라도 믿지 않으면 무효입니다. 가령, 지금 밖에서 홍수가 나서 모두가 대피해야 하는데, 이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이면 홍수는 나지 않는 것이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사건이 사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믿을 때에만 사건이 됩니다. 이와같이 믿는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영생을 얻기 위하여 성경을 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곧 내 생명을 위하여 기록된 것입니다. 내 생명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므로 믿어도 되고, 믿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을 얻지 못하면 이제 동물적 생명만 남습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하나님의 형상과 영생은 말씀과 함께 얻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으면 아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이심을 믿으면 아멘! 믿는 여러분은 이미 영생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생을 얻은 여러분은 사도 요한처럼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항상 말씀을 증거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2022년 9월 6일 오전 6:5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