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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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요19:38-42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성경을 보면 유감스러운 것은 이때쯤에는 도망갔던 베드로가 나타나서 장례를 좀 도왔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읍니다만 베드로는 끝까지 나타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는 순간은 무서워서 도망을 갔더라도 이제는 다 물러가고 시체만 남았으니,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다 모여서 장례를 치루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 은혜를 입었던 나사로를 위시한 수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에 갔는지 조용합니다. 단지, 여자 4명과 요한이 남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상당한 돈이 있어야 장례할 수 있듯이 그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무덤은 주로 동굴이어서 동굴 하나를 만든 다음, 그 후손들을 계속 거기에다 넣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자연 동굴이 많이 그것을 무덤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자연 동굴이 없으면 벽돌이나 대리석으로 많은 돈을 들여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무덤 하나 잘 만들어 놓으면 몇 대 위의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계속 한 곳에 시체를 보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으로 사용한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은 어째서 새로 장만했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추측하기로는 첫째, 조상 때부터 내려오던 무덤이 가득차서 더 이상 넣을 수가 없었던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리마대 요셉이 부득이 새 무덤을 만들어 죽음을 미리 준비해 두는 것입니다.

둘째로, 요셉은 돈이 많고 존경을 받는 지위에 있었으므로,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낡은 무덤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제부터 새 무덤을 만들어 자기가 들어가고, 그리고 아들, 딸, 손자 등 앞으로 몇 대를 내려가면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웬만한 부자가 아니면 새 무덤을 장만한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자인 아리마대 요셉은 자기와 후손들을 위하여 새 무덤을 만들었고, 그 무덤에 예수님을 먼저 모셨습니다. 자기가 먼저 죽었으면 그 무덤에 들어가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님께서 먼저 돌아가셨으므로 예수님을 자기보다 높여 먼저 모시고, 그리고 자기가 들어갈 참입니다. 그런 뜻으로 이 무덤에 예수님을 장례했습니다. 가문을 위해서 사용할 소중한 무덤을 예수님께 드리는 귀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가운데 흐뭇한 장면이 몇 군대 있습니다. 하마터면 예수님의 장례식이 사도 요한과 네 여인만으로 대단히 초라하고도 쓸쓸하게 지낼 뻔했는데 의외로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중 하나는 아리마대 요셉으로, 그는 용감하게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말했습니다.

"“당돌하게 시체를 요구했다”고 표현했습니다. 당돌하다는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닙니다. 그 당시에 이와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산헤드린 공회원의 한 사람으로 예수의 시체를 달라하고 장사 지낼 허가서까지 요청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을 정도로 위험한 태도였습니다."

막15:43

아리마대 요셉을 설명할 때, 눅23:51이나, 막15:43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그는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요, 고관이요, 부자임을 성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로 할 때에 찬성을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전형적인 경건한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당돌하게 감히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했고, 그리고 자기 무덤을 제공했습니다. 굉장한 모험이요 헌신이었습니다.

다음은 니고데모가 나타난 사실입니다. 그는 밤중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의 도리를 물었던 사람으로 예수님으로부터 부끄러움을 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중생의 도리를 잘 몰라, 그것도 모르냐고 책망을 들었던 것입니다.

니고데모 역시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며, 상당히 지체 높은 사람이기에 인간적으로 볼 때는 갈릴리에서 온 청년에게 면박을 받아야 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책망을 받아들임으로 중생의 도리를 알고 돌아갑니다. 만일에, 혈기를 부리며 “젊은 사람이 심하구만”하며 예수님의 말씀 도중에 나가버렸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니고데모는 침착하게 끝까지 듣고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예수님에 대해 생각을 합니다.

니고데모의 훌륭한 점은 당장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두고 두고 생각을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었고, 그는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습니다.

여기서 리트라는 향료를 다는 단위로 1리트라는 오늘날의 단위로 말하면 대략 320g 정도 됩니다. 따라서 100리트라는 무려 32Kg 가까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 어른 몸무게의 절반에 가까운 엄청난 양의 향료를 가지고 온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이렇게 많은 양의 향료를 단시간 내에 준비할 수 있었던 것도 기적이고, 한 번도 사람을 묻지 아니한 새 무덤을 십자가가 있던 골고다 주변에 갖고 있었다는 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운명하실 시간이 점점 가까이 오는 것을 보자 서둘러서 모든 것을 준비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배후에서 역사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증거해 줍니다.

요셉 때문에 예수님은 부자가 들어갈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이것은 사53:9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사53:9

이사야는 그 부자의 무덤에 예수님이 장례될 것은 600여년 전에 이미 예언을 했는데, 그 예언대로 부자 요셉이 새 무덤을 파 두었다가 예수님을 거기에 묻은 것입니다.

세마포와 향품은 옛날에 귀족과 왕족 정도의 수준에 있는 사람들이 장례할 때 필요한 물품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는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돌아가신 후 장례 치를 때에는 최고로 왕 같은 대접을 받았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예수님의 몸을 쌌던 수의에 대해 얽힌 이야기를 했으면 합니다. 튜링이라는 곳에 있는 예수님의 수의 이야기는 대단히 유명합니다. 이 수의는 길이가 4m 36cm, 폭이 1m10cm 인 세마포인데, 문제는 이 천에 예수님의 시체를 감쌌던 흔적이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과학자들이 여러 방법으로 연구한 결과, 예수님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분명한 것은 머리에 상처가 있고, 손발에 못 자국이 난 사람의 시체를 쌌던 세마포란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굉장한 온도가 아니고서는 몸의 흔적이 그 세마포에 눌러서 그대로 자국이 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주 뜨겁게 역사해서 그것이 세마포에 반사되어 자국이 난 것입니다.

천을 그대로 사진 찍어 네가티브로 된 것을 현상해 보니 사람의 모습이 좀 더 잘 나타났는데, 그 모습이 흡사 예수님 같았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이 수의를 예수님의 수의로 잘 모시고 있습니다. 이 수의가 발견되고 과학자들이 분석하여 발표함으로써 온 세계가 한 번 놀랐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입으셨던 수의인지는 하나님 밖에는 모르는 일입니다만, 어쨌든 방사선과 같은 굉장한 열기가 아니고서는 세마포에 그와같은 상처의 흔적이 나타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에 놀라운 열기가 강하게 작용하면서 부활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예수님은 물론 부활하신 증거까지 말할 수 있으므로 계속해서 연구 중에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아주 귀한 세마포로 예수님의 시체를 쌌다고 하는 그 자체가 오묘한 섭리입니다. 그냥 알몸으로 내버려 두었다면 이러한 증거는 없지 않겠습니까? 2,0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과학자들에 의해 세마포를 증거할 수 있음은 정말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지막이 충성을 바친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 살아계신 생전에는 언제 어디서 말씀을 들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니고데모도 한번 밤 중에 찾아온 것 이외에는 더 이상 자세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는데, 두 사람 다 고관이요,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요, 존경받는 지성인이며, 특히 하늘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오늘이나 내일이나 메시야가 올 것을 간절히 기다리는 철저한 성서적 신앙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으로는 숨은 교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감정적인 사람, 지적인 사람, 의지적인 사람입니다. 감정적인 사람은 조금만 자극을 주면 당장 예수 믿겠다고 쉽게 결단을 합니다만, 신빙성은 없습니다. 언제 또 다른 자극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지성적인 사람은 결단을 쉽게 하지 않습니다. 속으로 깊이 생각하고, 일단 결정을 내렸어도 자기체면, 위신, 지위 등을 생각해서 말을 잘하지 않습니다. 물론, 분명한 것은 합리적 이론에서 확신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확신에서 합리적 이론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깊이 생각한다고 해서 예수가 메시야라는 결론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도마는 의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져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가 없었지만, 일단 믿음 위에 선 뒤에는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의심이 많다고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의심을 위한 의심일 때가 문제지,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경우에는 가장 확실하고 귀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비판 없는 믿음은 비판 없이 무너집니다. 그러나 비판 있는 믿음은 비판 앞에서 튼튼하게 서서 신앙을 변증할 수 있습니다. 지적인 신앙은 화끈하지는 않지만 조용한 중에 깊이 들어가고, 특히 환난 때에 견고하게 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십자가 사건 앞에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거나 오천 명을 먹였을 때에, 메시야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이적을 보고도 그것을 메시야의 증거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보고서는 그 분이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받아들입니다.

십자가 중심의 신앙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가장 귀한 증거가 무엇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 되시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기적을 통해서 메시아이심을 안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알았습니다. 몰론, 생각은 다 있었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말하기를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사람이라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적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이미 인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용기가 없고 위탁이 없었습니다. 지적으로 인정은 하나 전적인 위탁이 없었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 모습을 보고 정말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심을 확증하게 됩니다.

사람의 참 모습은 죽음에서 드러납니다. 진실은 죽음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니, 끝까지 보아야 하고 마지막 말을 들어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사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끝나느냐는 더욱 중요합니다. 주위에 보면 살아생전에는 멋있는 사람 같았는데, 마지막에 가서 실망을 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지휘관인 백부장과 함께 지키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죽으시는 모습을 보고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죽여 놓고서야 알게 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정녕 의인이었도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중생의 도리를 말씀하시다가 마지막에 결론을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느니라”고 니고데모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풀이하면 “내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것을 보아야 네가 깨닫게 되겠구나. 그 날에 되어야만 네가 알겠구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 말씀이 사실화되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을 보고서야 모든 것을 다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헌신합니다. 깨달은 이상 더 주저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지적인 신앙, 숨은 신앙이 십자가 사건 앞에서 빛을 발하게 됩니다. 이 엄청난 사건 앞에서 체면, 명예, 지위를 다 포기하고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을 동정했다가는 예수님과 공동 운명에 들어갈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모두 도망간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이 위험한 시간에 모든 체면을 다 버리고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 합니다. 더 이상 숨어서 믿지 않고 당돌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시체를 요구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예수님처럼 죽어도 상관이 없다는 각오를 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십자가의 승리입니다.

말없이 죽으신 예수님이시지만 이미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을 사로잡아 참 제자 되게 하신 것입니다. 환난이 있을 때에 거짓 신앙은 무너져 버리지만 숨어 있는 깊은 신앙은 용기 있게 나타납니다. 참된 신앙이란, 환난과 핍박 속에서 자기 모습이 나타나고 큰 위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의 신앙도 이 두 사람과 같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년 8월 21일 오전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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