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4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1-3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예수님의 자신을 위한 중보 기도에는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1개인의 안락과 이익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화를 구한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살아도 하나님의 영광, 죽어도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먹어도 하나님의 영광, 마셔도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나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하십니다.
얼마나 멋진 인생입니까? 우리 인생도 멋진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밤낮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목구멍이 포도청이어서. 하는 삶을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너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초라한 인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산 영광스런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영광스런 인생을 살도록 불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영광스런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로 인하여 나타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2세상에 오신 목적을 잘 깨닫고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흔들리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 내용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위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2-3하나님께서 만민을 다르시는 권위를 예수님께 주신 목적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의 권세를 예수님께 주셨는데 그 권세로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3중보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적절한 때와 시기를 아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아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때가 되면 하나님이 순종하는 아들을 영화롭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요17:1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는 영욕의 생애였습니다. 가시는 곳마다 비난과 핍박이 늘 따랐습니다. 아직도 십자가의 부끄러움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이르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만드실 것을 확실하게 믿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때가 되면 반드시 영광을 받게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고 바로 영광스러워진 것이 아닙니다. 한동안은 바로에게 멸시를 받고, 동족에게도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때가 이르매 영광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때의 대한 인식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에게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계획이 있으십니다. 그 계획을 ‘작정’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작정하심 속에는 무원칙적인 행동이 아닌 일정한 순서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때’라고 합니다.
그래서 갈4:4을 보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라고 했습니다. 원문을 보면 때가 차다는 것은 시간이 충만해지다라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를 임신한 여인이 10개월이 되면 해산의 때가 차는 것과 같이 시간에도 때가 있습니다. 해산할 때, 어떤 사건이 이루어질 시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시간에 대해 민감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도 기쁠 때가 있습니다. 슬플 때가 있습니다. 고독할 때가 있습니다. 무척 분잡할 때가 있습니다. 핍박을 당할 때가 있고, 승승장구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똑같은 원칙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때 그때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고독이 있습니까? 그럴 때에는 인내해야 합니다. 감당 못할 시험과 핍박이 있습니까? 그때는 엎드려서 기도해야 합니다. 엄청난 유혹이 있습니까? 그때는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여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상황이 다 다릅니다. 그러므로 상황에 맞게, 때에 맞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히11장 전반부를 보면 믿음으로 승리하는 사람들이 열거됩니다. 모두가 믿음으로 승리한 인물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때에는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후반부에 보면 핍박의 상황이 나옵니다. 그 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죽는 것이 영광입니다. 죽지 않으면 비겁해 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때를 아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악한 마귀는 우리가 때를 달리 생각하게 만들어 넘어지게 합니다. 공부 못하는 학생은 꼭 놀 때는 공부 생각하고, 공부할 때는 놀 궁리를 합니다.
때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할 때라면 생명을 걸고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인내해야 할 때는 인내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싸워야 할 때는 자신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악한 마귀와 싸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때를 아는 지혜에는 인내의 요소가 숨겨져 있습니다. 때가 되기 전에는 아무리 이루려고 발 버둥쳐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될 때까지 성도는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믿음이 자랐다는 것은 인내할 줄 알고 기다릴 줄 안다는 것입니다. 쉽게 결정하거나 쉽게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절대 서두르지 않으셨습니다. 사역 초기에 예수님은 자신을 숨겨야 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럴 때는 자신을 온전히 숨기십니다. 사역 말기가 되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십자가를 지셔야 할 것을 드러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때에는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숨길 때가 있고, 드러낼 때가 있습니다. 드러낼 때까지 참을 줄 알고 기다릴 줄 아는 성도가 지혜로운 성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였습니다. 때가 이를 때까지 기다려야 거둘 수 있습니다. 때가 이르기 전에는 어떤 일이 있습니까? 낙심하게 되고 피곤하게 됩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인내함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갈6:9‘하나님, 나를 통해서 영광 받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한 다음에는 내 앞에 전개되는 어떤 사건에 대해서도 불평, 원망하면 안됩니다. 이제는 선택한 자유가 없으므로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기도는 대단히 의미깊은 기도이지만, 한편으로는 위험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눈 앞에 십자가를 두고 ‘아들을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영광 받기를 원하시면 십자가를 지겠다는 결단의 기도입니다. 즉,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위대한 기도입니다.
지금 이 시간이야말로 예수님의 생애 중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다른 시간은 몰라도 죽는 그 시간만은 가장 사람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오복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임종의 복입니다. 오래 살았거나, 건강하게 살았다고 복이라 하지 않고, 사람답게 죽어야 복이라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죄 짓는 현장에서 죽거나, 부끄럽고 비굴한 삶을 살았다면 얼마나 불행합니까?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순간에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에 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기꺼이 십자가를 지겠다고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죽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우선 자원적인 죽음이라야 합니다. 내 의사와는 전혀 달리, 할 수 없어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다음은 창조적인 죽음이어야 합니다. 마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죽음과 함께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함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야 말로 몇 백배, 몇 천 배, 몇 만 배의 열매를 가져온 가장 귀한 죽음이었습니다.
또한, 구원적인 죽음이라야 합니다.
나도 죽고, 남도 죽으면 그 죽음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죽어 희생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죽음은 영광스럽고 영화로운 죽음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