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6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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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요16:16-18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누구의 말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의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3년 동안 지내며 함께 먹고 마시며, 예수님께서 천국 말씀을 전하시고 기적을 일으키는 모든 일들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16절의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는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3일 후에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써 제자들은 다시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성령님을 받은 우리는 이 말씀을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오셔야 우리는 부활의 진리에 대해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이나 상식 그리고 경험으론 부활의 진리를 깨달을 수도 인정할 수도 믿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17~18절에서 모른다는 동사가 두 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제자들이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뜻입니다.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압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천국으로 간다는 확실한 믿음 위에 서 있습니다. 그 믿음을 굳게 잡고 항상 아멘 할렐루야로 화답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확신하지 못하고 자꾸 흔들리는 사람은 영적 진리를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으로 이해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진리는 인간의 이성과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은 잠깐 이라는 시간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으로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염두에 둔 말씀입니다.

‘9시간 후면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이다. 그리고 사흘 후면 다시 부활하여 너희가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잠깐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시간관을 알 수 있는데, 9시간도 잠깐이고 사흘도 잠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내포된 의미는 시간의 길이가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의 삶 자체가 잠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평안한 10년과 병든 1년을 비교한다면 병든 1년이 훨씬 더 긴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비록 6시간이지만, 이 시간은 우리의 일생과도 비교가 될지 않는 긴 고통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고통을 잠깐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로 지나간 생을 잠깐이라고 말합니다. 벌써 7월이 되었고, 10년이 꿈과 같이 흘러갔다고 표현합니다. 우리의 전 일생을 잠깐으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무리 슬프다 해도 잠깐이고, 아무리 기쁘다 해도 잠깐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꿈과 같이 지나가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아무리 어려운 고통도 그리 문제가 안됩니다.

순교사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로마의 원형극장에서 한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꼭 껴안고 순교자의 대열에 서 있습니다. 저쪽에서는 굶주린 사자들이 입을 벌리며 성도들을 향해 달려옵니다. 이때 어린아이가 무서워서 울며 어머니 가슴으로 얼굴을 묻자, 어머니가 조용히 타이릅니다. ‘얘야, 잠깐만 참아라. 곧 밝아질 것이다’ 사자가 물어뜯는 순간에는 아프겠지만, 그 순간 잠깐만 지나면, 하늘나라가 우리에게 전개될 것이고, 주님의 영접을 받을 것이니 잠깐만 참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시간관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잠깐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영원무궁하시다는 것입니다.

잠깐이라는 말은

1시간적으로 짧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질적으로는 큰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 몸이 아프거나 내 육체가 썩어지는 것은 큰 일이 아닙니다. 정말 큰일은 하나님의 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큰일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큰일이며 무엇이 작은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명예를 잃거나, 신앙을 잃으면서까지 물질을 소유하려고 안간힘을 쓰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생명이 죽어가는 십자가의 고통 앞에서도 잠깐이라고 하셨습니다. 내 목숨 하나 죽는 것은 작은 일이고, 만민을 구원하는 것이 큰일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심리학 박사이신 리처드 칼슨은 ‘성공한 사람은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공하고 싶거나 행복해지고 싶으면 사소한 일에 초연해지는 연습을 하라.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않는 법을 배우게 된다면, 오늘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항상 열심히 산다면, 그것은 나의 멋진 삶에 씨앗을 뿌리는 일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사소한 일에 초연하다

2잠깐이란 제한된 시간을 말합니다.

반드시 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고통이 아무리 심해도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가끔 죽는 순간에 대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하고 미리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죽는 것은 잠드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또한 죽음과 함께 의식은 없는 것이므로, 어떤 고통이라도 죽음과 함께 끝나는 것입니다.

빌라도나 로마 군인이 아무리 예수님을 괴롭힐지라도 숨이 넘어가면 끝나는 것입니다. 시체에는 아무리 고통을 주어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법입니다.

예수님이 그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시고 영혼이 떠난 다음에는 계속해서 더 이상 예수님을 괴롭힐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고통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것은 살아있는 동안이며, 죽으면 육체의 고통은 끝납니다. 제한된 고통이란 말입니다.

사실 끝없는 고통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체는 잠깐 지나가는 제한된 것이므로 고통을 더해 보아도 한계가 있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13장에서 죽음을 생명에 이르는 과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이제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밤과 낮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밤이 깊었다는 것은 곧 아침이 오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어두움이 지나야 아침이 옵니다. 다시 말하면, 빛으로 향한 과정으로 어두움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생명으로 가는 과정으로 어두운 밤, 즉 죽음과 고통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식은 지금 어두움 속에 있을 것이 아니라, 저 밝은 아침에 가 있어야 합니다. 이 땅의 것만 바라보지 말고 저 멀리 밝은 날을 생각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현재 내게 닥친 고난과 어려움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 고난을 극복하고 이기면 얼마나 많은 복을 주실까하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를 보고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멀리 보고 살아가듯이 멀리 보고 사는 것이 교인입니다. 우리는 멀리 보고 살아야 합니다.

3잠깐이라는 말씀은 필연적이라는 뜻입니다.

생명을 위해서는 죽음이, 빛을 위해서는 어두움이, 앞에 있는 영광을 위해서는 오늘 이 고통이 필연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부활을 전제로 한 죽음이요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곧 나의 부활입니다.

왜 고통이 도리어 기쁨이 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죄 사함의 확증이요, 예수님의 부활은 곧 나의 부활이요, 예수님의 승리는 곧 나의 승리이기 때문이 기쁨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부활을 전제로 한 죽음이요, 고난입니다. 기쁨으로 연결된 근심, 행복으로 끝나는 슬픔, 뜻이 있고 약속이 있는 고통이라면 못할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주를 위한 고난은 고난이 클수록 기쁨도 크고, 고난이 무거울수록 영광과 자랑도 큰 것입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의 고통이란 저주 때문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것이므로 고통 자체에 의미가 있고, 상급이 있고, 영광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맹장 수술을 한 여 집사님 병원 심방을 갔습니다. 심방 중에 여집사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집사님은 아이를 낳아보셨으니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아이 낳는 것이 아픕니까? 맹장 수술이 아픕니까?’

그러자 심방을 갔던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맹장 수술이 더 아프다는 사람, 아이 낳는 것이 더 아프다는 사람으로 의견이 갈렸습니다. 그런데 그 맹장 수술을 한 여 집사님이 참 의미 있는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맹장 수술이 더 아픔니다. 왜 그런가 하면 맹장 수술은 의미 없는 고통이었지만, 해산의 고통은 아이를 낳는 의미 있는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까? 실제로 어느 것이 더 아픈지는 모르겠지만, 문제는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 또는 부끄러운 것이냐 영광스러운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고통은 비록 작아도 무거운 것이고, 영광스러운 고통은 좀 무거워도 견딜만 합니다. 문제는, 고통의 성격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떠한 고난이라도 잠깐으로 생각합시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잠깐이요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에서 찾아야 합니다. 절대적인 큰 기쁨으로 작은 슬픔과 고난을 소화하고 이겨서 늘 영생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년 7월 7일 오전 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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