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9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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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1-6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14:1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은 요13:33 말씀으로 인함입니다.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요13:33

이 말씀을 베드로는 수긍하지 않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요13:36-37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냉정하게 물리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오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런 분위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분위기가 팍 가라 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는데, 따라 갈 수 없다고 하시니 제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근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집에 가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곧 아버지 집으로 가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14장 2-4절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요14:2-4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집으로 가시는 일은 본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도 되지만, 그보다 중요한 의미는 우리를 위해 거처를 예비하러 가신다는 것입니다.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는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천국을 예비하러 가신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주님이 천국을 예비해도 들어갈 길이 없습니다. 왜냐고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3:23-24

천국 문을 활짝 여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의 보혈 밖에는 없습니다. 주님의 피 값으로 구속받아 의로워져야 천국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그 죄 값을 대속하여 주시지 아니하면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십자가의 길을 가고 계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는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만 우리들의 죄 값이 다 치루어지고, 그 결과 죄가 하나도 없는 상태, 마귀가 참소할 수 없는 상태인, 하나님의 의를 받았다는 것을 확정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롬4:25

그러므로 주님은 반드시 부활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부활하시기 위해서 지금 십자가로 가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후에 주님은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은 활짝 열어 놓으신 천국 문을 아무도 닫을 수 없게 만드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이름을 믿고 부르기만 하면 그 나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거처를 예비하러 가신다는 말씀은 이와같이 십자가를 지고, 부활하고, 승천하심으로 천국 문을 열겠다는 의미입니다.

3절을 보면 주님은 거처를 준비하는 일이 끝나면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14:3

여기에서 다시 온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저는 세 가지 뜻이 있다고 봅니다.

1부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천국으로 들어가는 길을 활짝 열어 놓으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다시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2성령이 오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면 다시는 육신으로 계시는 주님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 대신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어 주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14:16-1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16:7

그러므로 다시 온다는 말씀은 성령이 오신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3재림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날에 다시 오셔서 우리를 주님 나라로 인도하시겠다는 이야기입니다.

3절의 ‘다시 와서’라는 말씀은 이 세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 말씀의 의미는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내가 지금 처소를 예비하러 가지 않느냐? 예비하면 다시 올 것이다. 하나님을 믿느냐? 나를 믿어라. 그러면 너희 마음에서 근심이 떠날 것이다.

천국 문을 활짝 열어 놓으신 후에는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 나라로 인도하실 것이므로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제자들이 들어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제 베드로를 대신해 현실주의자이고 회의주의자인 도마가 질문합니다. 5절 말씀을 봅니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요14:5

우리가 대화를 나눌 때 상대방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답답한 경우가 없습니다. 말이란 서로 뜻이 통해야 말이 됩니다. 이런저런 방법으로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 것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이유는 자신들의 수준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이큐나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화의 단절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영이 살아나기 전에는 영의 세계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이성과 상식과 경험으로 살아갑니다. 어려서부터 육의 세계에 익숙해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 문제가 들어오면 육적 사고와 충돌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영적 공동체이기 때문에 세상의 도덕, 윤리, 합리성의 잣대로 재면 맞지 않습니다. 왜 교회가 많은 돈을 들여 선교를 하느냐? 내국인들에게도 전도해야 하는데 왜 외국에 나가서 선교한답시고 그렇게 많은 돈을 들이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갈등은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둘째 영적인 것은 훈련을 받고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터득하는 게 아닙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설교를 들었지만 육적인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고 말씀, 기도, 찬송에 익숙하다고 영적인 것은 아닙니다. 성령님의 역사로만 영적인 것이 이해가 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령으로 기도 해야 합니다. 찬송이라고 모두 찬송이 아닙니다. 찬양할 때 성령님의 감동으로 해야 참된 찬송이 됩니다.

셋째 그러나 육적인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 세계로 인도하는 길목이 됩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르다는 가장 신앙적인 말을 했지만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죽은 후에 부활을 믿고 있었지만 당장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은 믿지 못했습니다. 마치 우리의 믿음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시자 그는 번민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이 나이에 어머니의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람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불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듯이 성령으로 난 사람은 모두 이러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갈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의 수가 동네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좀 달라고 하자 여인은 유대인인 당신이 어찌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며 따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말씀하시자 여인은 그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대화와 육적인 대화의 차이입니다.

본문에서 도마의 질문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 길이 무엇이고, 어디이며 왜 가시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도마는 굉장히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께 길이라는 단어 하나를 던졌습니다. 도대체 길이란 무엇인가요? 인생의 가장 기본적 문제가 길이라는 단어 속에 집중돼 있습니다.

모든 철학에서 문제가 되는 세 가지는 나는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길입니다. 인생은 스스로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인생의 길이란 세상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 문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6절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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