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8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0

신앙고백

Confession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요13:36-38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라가겠다는 자세를 가지고 질문을 했던 베드로가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을 해보십시오. 주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셔서 베드로의 기를 확 꺾어 놓으셨을까요?

그것은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 뜻을 위해 희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중요한 요건이 하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베드로는 아직 그 요건을 갖추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 요건이 무엇입니까? 37절에서 베드로에게 부족했던 요건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한 암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요13:37

베드로가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다고 말한 것은 거짓이 아닌 진심입니다. 결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도 베드로가 모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속사람으로는 진심으로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것을 원하지만, 겉 사람의 방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롬7:18-23

예수님이 보실 때 베드로는 아직 겉 사람인 자아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자신감에 불타고 있습니까? ‘내가 그래도 수제자인데 어떻게 선생을 버리고 갈 수 있겠는가? 주님이 죽으러 가시면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려야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보면 한 수 더 뜨고 있습니다."

마26:33을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26:33

다른 제자들이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자기만은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베드로의 태도는 참 감동적인 자세요, 칭찬할 만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스스로 실격자인 것을 입증하는 행동에 불과했습니다. 겉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은 절대로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미 그의 실패를 예견하셨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요13:38

조금 뒤에 이 예언은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실제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비참한 자리로 떨어졌습니다.

여러분, 복싱 선수들이 링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어떤 복서가 한 방을 맞아 다운을 당했다고 해 봅시다. 우리는 한번 다운을 당한 정도라면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 다운을 당하면 미심쩍은 마음이 들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듭니다. 그러다가 세 번째로 다운되면 가망이 없겠구나 하고 생각을 합니다. 세 번 다운되면 끝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 역시 그러한 비참한 처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따라가기는 고사하고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러한 실패를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그가 실패한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자아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기독교의 가장 큰 이단은 인본주의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적 인본주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해 내가 뭔가 할 수 있다고 하는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그런 사람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 지금은 안돼. 지금은 날 따라올 수 없어.’

자아가 살아서 펄펄 뛰고 있는 사람은 절대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는 그 희생의 길을 걸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참 좋아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

갈2:20

한마디로 말하면 난 죽었다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런데 입으로는 그렇게 청산유수로 ‘나는 죽었다’고 말하는데 실제로 보면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서 펄펄 뛰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자아가 살아 있으면 절대 주님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또 하나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지만 후에는 따라올 수 있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후에는’ 이라는 말이 얼마나 긴 시간을 가리키는지 우리가 가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은 안되지만 나중에는 따라 올 수 있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말씀 아닙니까? 베드로가 지금 주님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그의 자아, 겉 사람이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후에는 그가 따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일이 어떻게 가능 하겠습니까? 베드로가 자아가 산산이 깨어지는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대로 베드로는 자아가 깨어지는 처참한 과정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과정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는 숱하게 실패를 했습니다. 좌절감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계집종 앞에서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입에 풀칠이라도 하자는 생각에 갈릴리로 돌아가서 어설프게 고깃배와 그물을 손질하고 밤새도록 고기를 잡느라 비지땀을 흘리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에게 자존심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도 내가 수제자인데 하는 생각이 있습니까? 자기라는 것이 살아있습니까? 베드로의 자아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완전히 부서져 버렸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때에 예수님은 다시 그를 찾아오셔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마 옛날 같으면 ‘주여,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아직도 모르고 계셨습니까?’하고 자신만만하게 대꾸를 했을 것 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주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살아서 펄펄 뛰던 베드로의 자아가 완전히 깨어져버린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그렇게 실패한 자신을 찾아오셔서 주님을 따르라고 하는 음성을 듣는 순간 은혜가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산산이 깨어진 자기 안에서 은혜의 샘이 솟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살아 있을 때에는 은혜를 잘 알지 못합니다. 내가 산산이 깨어지고 나면 그 때에야 비로소 은혜가 무엇 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비천한 자를 높이 들어 사용해 주시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이기게 해 주시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무 것도 못할 것 같은 힘없는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해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감격스러운 은혜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깨어지니까 비로소 그러한 은혜가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철저하게 깨어진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샘이 솟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귓가에 부드러우면서도 자석처럼 그의 마음을 송두리째 잡아당기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요 21:19).

주님이 그를 십자가의 길로 초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겸손하게 일어나서 묵묵히 주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십자가에 죽는 그날까지 주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자기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 분, 여러분은 이와같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감사하셔야 합니다. 이미 자아가 깨어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은혜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가슴을 치며 탄식해야 합니다. 아직도 자아가 살아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자신이 깨어져야 할 과정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배우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물론 은혜를 금방 배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시간이 걸립니다. 수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베드로의 경우처럼 지금은 은혜를 잘 몰라서 주님을 따를 수 없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에는 은혜를 아는 사람이 되어 주님을 따르게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걸리더라도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자아가 하나하나 깨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은혜를 맛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끝까지 자아를 깨트리기를 거부하면 하나님께서 강제적으로 우리 자아를 깨트리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은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깨어지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랑하는 자는 자아가 살아 있으면 반드시 그 자아를 깨트리고 꺾는 과정을 주십니다.

징계를 통해서든지 아니면 가시를 주시든지 간에 하나님은 그 사람의 자아를 꺾으십니다. 베드로의 자아를 꺾으셨듯이 우리의 자아를 꺾으십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은혜가 무엇인가를 배우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을 참으로 가슴 아파합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생하시는 분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제적 어려움 앞에서 슬퍼하거나 한탄하고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왜 우리에게 이와 같이 어려운 연단의 시기가 왔을까 하고 영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동안 한국 교회 성도들은 자아를 죽이지 않아서 주님을 따라가지 못한 일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를 드리기보다 자기 뜻을 위해서 뭔가를 해보려고 이리 저리 몸부림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어려운 지경에 몰아넣으신 것에는 이와 같은 고통스런 경제 위기를 통해 저를 산산이 깨트리시고, 여러분을 산산이 깨트리셔서 그 깨어진 틈바구니로 하나님의 은혜의 샘이 솟아나게 하시려는 선하신 뜻이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119:6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119:7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느니라"

히12:11

우리가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세상적으로도 성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적으로 복 주시는 자는 재산을 모으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녀들을 잘 키워서 사람들 앞에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건강을 잘 돌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노년에 고생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까를 생각하며 대비하는 것도 중요 합니다. 노년에 자녀들이 모두 출가한 뒤에 혼자 고생하며 어려움을 당하는 것만큼 처량한 일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년에 어떻게 하면 건강하고 편하게 살까? 자녀들이 고생하지 않도록 무엇을 줄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지 꼭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만군의 야훼 하나님을 믿고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그 광대한 뜻에 매혹된 사람은 이 세상에 대해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은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지는 꽃과 같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조금 있으면 하나님이 지으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왕노릇 하며 살게 될 그 날이 올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에서 어떻게 영원토록 살 것이냐를 마음에 두고 생각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잠시 편하게 사는 것이나 남보다 앞서는 것, 쌓아 놓고 사는 것에 매력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아가 깨어지기 전에 영적으로 교만 했을 때에는 세상적인 것을 가지고 얼마나 흥분했습니까?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을 만나 그 모든 것들이 내 손에서 떠나게 되자 그 모든 것 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새삼스럽게 다가오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놀라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 나라에서 고개를 들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깨를 펴고 걸어 다녀야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저는 세상에 살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이 가신 길을 걸어가려고 노력하다가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러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고백하면서 천국 길을 걸어 다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주님을 따라 갑시다. 여러분 가운데는 주님께서 ‘지금은 안돼’ 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후에는 반드시 여러분이 주님을 따라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주님께 순종합시다. 그래서 우리 남은 여생을 멋지게 살아봅시다. 그리고 천국에 가서 면류관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rchive

지난 말씀 보기

지나간 날의 말씀을 다시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세요. 날짜를 선택하면 해당 날짜의 설교로 이동합니다.

전체 목록 보기

2026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