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5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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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요13:2-5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요13:2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특별하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 자신을 배신할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아무 내색도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끝까지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단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사랑과 배신입니다. 이것은 어떤 드라마의 주제가 아니라 주님 최후의 성만찬 주제입니다. 사랑의 이면엔 배신이 도사리고 있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조건 없는 사랑 무한한 사랑 용서하는 사랑에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려는 사탄의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사랑과 배신은 유월절 식탁에 함께 놓인 두 가지 메뉴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의 믿음의 현주소는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입니까 배신입니까? 교회에 잘 나오는 척하고 예수님을 잘 믿는 척하지만 속으로 엉뚱한 생각을 갖고 있진 않으신지요? 여러분 중에는 만에 하나라도 교회를 이용하고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생각을 갖고 계신 분이 한 분도 없으시지요? 만약 그런 생각을 가졌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에 대한 배신입니다.

여러분들은 단 한분도 주님의 사랑을 배신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헌신으로 보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며 예수님은 그 사랑을 위해 생명마저 내던지십니다. 그에 비해 인간의 사랑은 열정이 있고 왕관도 벗어 던지며 국경마저 초월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면에 배신이라는 마귀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귀가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을 팔겠다는 생각을 집어 넣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죄는 마귀가 시켜서 한 것이고 인간은 아무 책임이 없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마26:24

마귀가 인간의 마음에 죄를 짓게 할 생각을 집어넣는다 하더라도 인간이 그것에 동의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모든 죄는 마귀와 인간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죄에 대해 마귀가 저질렀다고 인간이 본능과 속성에 따라 저질렀다고 변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과 다락방에 모여 소박한 만찬을 하십니다.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요13:3

저녁 먹는 중 :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12제자와 함께 하신 최후의 만찬입니다.

이 사건은 로마의 화가 미켈란젤로에 의해 최후의 만찬 이란 그림으로 남겨져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이 많은 사람들 특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을까요? 만찬 중에 두 가지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성만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26:26-28

당시 제자들은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떡과 포도주를 나눠 주시면서 나의 살과 피라고 말씀하신 뜻을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후에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아주 중요한 영적인 일들을 할 때가 있습니다. 곧 성만찬을 지키는 일입니다. 성만찬이란 쉽게 말해 예수님을 먹는 일입니다.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어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만찬을 통해 예수님을 먹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갈등이 생기는 이유는 머리로 이해하려 하고 의지적으로 믿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의심이 들고 이성적인 논리에 맞지 않으면 갈등하기 시작합니다.

성만찬 사건을 통해서 본다면 믿음이란 한 마디로 예수님을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그분의 피와 살의 흔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 성만찬입니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은 아름다웠고 길이길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2예수님께서 음식을 드시던 중에 일어나셔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상과 같이 두 사건이 최후의 만찬 중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사건이 먼저 있었고 나중에 있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4복음서에 두 사건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성만찬만 있고, 요한복음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성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이미 아셨습니다. 십자가 지실 것을 이미 아셨습니다. 그래서 유언과 같은 메시지를 담아 보여 주신 것이 바로 세족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그들의 발이 더럽기 때문이 아닙니다. 문화나 습관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단순히 남을 섬기는 겸손과 섬김의 도리를 가르치시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있고 영적 통찰력이 있는 사건입니다.

우리의 더러운 발을 관습 예의 섬김 봉사의 의미로 씻겨주는 것이라면 목욕업 종사자가 씻겨주는 것과 차이가 없습니다. 그들에게 돈을 주면 발뿐 아니라 온몸도 씻겨줍니다. 그런 봉사에는 감동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발을 씻겨주면 안 되는 사람이 씻겨줄 때 감동이 옵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요13:4-5

유대는 원래 건조한 땅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 당시에는 도로가 비포장 도로였습니다. 요즘처럼 잘 만든 구두를 신고 다니면 걱정이 없겠지만 그 당시에는 샌들을 신고 다녔기 때문에 조금만 걸어도 발에 먼지가 수북이 쌓일 정도로 발이 더러워집니다. 그래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 집의 문간에는 반드시 발을 씻을 수 있는 물들 담아 놓은 항아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종이 있는 가정은 종이 나와서 손님들의 발을 씻겨 줍니다. 만약에 씻겨 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자기가 발을 씻고 들어가야 합니다. 유대 나라에서는 이와 같이 발을 씻고 드나드는 것이 하나의 습관이 되었고 전통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예루살렘을 마지막으로 방문하시고 유월절을 맞으시게 되었습니다. 유월절 만찬을 잡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미리 준비된 다락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들은 하루 종일 걸어 다녔기 때문에 발이 더러워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유월절 만찬을 먹을 다락방에는 식사만 준비 되었을 뿐 예수님과 제자들을 접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더러워진 발을 씻어 줄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서로 씻어 주든지 아니면 자기가 자기 발을 씻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드디어 식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누군가 일어나서 예수님의 발을 씻겨 주리라고 생각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지나고 음식을 다 먹어 가는데도 제자들 중 단 한 사람도 일어나서 발을 씻어 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가관이었던 것은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그 만찬석상에서 제자들끼리 ‘누가 더 크냐’하는 문제로 눈에 보이지 않는 파워 게임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 처형될 것이라는 말씀을 수없이 하셨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어떤 심각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고 무거웠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예루살렘 전체의 분위기가 살벌했습니다. 무슨 일이 터질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사람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과의 마지막 식사가 될지도 모르는 시간인데,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사랑하는 제자들이라면 그 자리에서 어떻게 파워 게임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제자들은 성만찬 자리에 앉아서 ‘누가 예수님에게 제일 인정받는 제자인가? 누가 예수님의 바로 오른편에 앉을 것인가?’를 놓고 서로 신경전을 벌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파워 게임을 하고 있는 제자들의 마음을 읽으시고서 식사를 하시다 말고 일어나셨습니다. 겉옷을 벗어 옆에 놓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동이신 채 문간으로 가셔서 대야에 물을 부으시고 돌아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어느 제자를 제일 먼저 씻기셨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베드로가 처음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누군가의 발을 씻기 시작하셨습니다. 만일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예수님이 일어나서 여러분의 발을 씻으려고 대야에 물을 떠오면 적어도 예의가 있고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입으로는 예수님을 주라 부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면서도 제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기의 더러운 발을 내밀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몇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말씀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말이 없고 변명이 없습니다. 사랑은 조건 없는 행동이고 이유 없는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과 애정으로 아무 말 없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실 때 종의 모습을 가지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지배자의 모습이 아니라 종의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가 좋은 일을 하고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종의 모습이 아닌 군림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종의 모습으로 헌신할 때 타인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겁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은 육체적 노동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말과 생각만으로 사랑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젖은 발을 수건으로 닦아주시며 깨끗이 마무리까지 하십니다.

진정한 사랑은 다른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것을 한다는 뜻입니다. 나도 싫고 너도 싫은 것을 할 때 곧 사랑입니다.

넷째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모습에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으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6-8

이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인가요. 힘 있는 사람이 양보하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 양보하면 감동을 주게 됩니다. 아주 귀하신 분이 종의 모습으로 다가오실 때 우리는 형언할 수 없는 존경과 사랑을 보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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