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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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11:33-35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11:33-35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세 번 정도 운다고 합니다. 누구나 처음 태어날 때 웁니다. 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을 낳으시고 길러 주신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웁니다. 그리고 크리스천이라면 하나님을 만났을 때 웁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는 짧은 말씀에는 기가 막힌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웃으셨다’라는 기록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 말씀은 우리말로 세 단어로 번역돼 있습니다. 그러나 영문에는 두 단어(Jesus wept)로 구성돼 있습니다. 성경 말씀 중에 가장 짧은 문장이지만 가장 깊이 있는 말씀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우셨을까요?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의 눈물이 중요할까요? 하나님의 눈물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셨다’는 것은 아주 특이한 일입니다. 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셨을까요?

첫째,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눈물은 고통스러워 흘리는 것과 사랑해서 흘리는 것이 있습니다. 자녀가 잘못되면 부모는 피눈물을 흘립니다. 그것은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셋째, 예수님에게 감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울 줄도, 웃을 줄도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감정이 없는 사람은 현상만 있을 뿐입니다. 사람에게 감정이 있다는 사실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감정이 없는 돌멩이가 아닙니다. 거룩한 진리와 공의만 내세우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시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참된 구원에는 구원하시는 분의 눈물이 있고, 구원받는 자의 눈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때 눈물을 흘리시고, 구원받는 우리도 눈물을 흘립니다.

예수님의 눈물에 대해 깊이 묵상할 수 있는 주제는 ‘예수님의 눈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입니다.

집에 있는 벌레가 죽었을 때 통곡하며 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벌레처럼 하찮은 존재는 눈물을 흘릴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깨어진 항아리, 버려진 옷과 구두, 폐기된 자동차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쓰레기를 보고 우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부모, 형제, 친구를 잃었을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립니다. 그들은 귀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아끼고 애착을 느끼는 물건이 깨어지거나 없어졌을 때 속상해 합니다. 그것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눈물과 가치는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눈물은 드라마를 보고 흐르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고통으로 인해 불쌍히 여기는 감정으로 흐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보시고 우신 이유는 나사로가 눈물을 흘릴 만한 가치가 있는 특별하고 보배로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통계를 보면 자살하는 사람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람보다 더 많다고 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자살할까요? 자신이 특별한 존재요, 의미 있는 존재요,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있어야 하는 가치 있는 존재라고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주검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셨다는 의미입니다. 능력자의 눈물이요, 절대 구원자의 눈물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의미 있는 귀한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실 만큼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인간에 대한 가장 큰 모욕은 동물에 비유하는 일입니다. 개 만도 못하다. 돼지 같다 라는 말로 사람을 표현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동물의 형상으로 말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소중한 까닭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종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귀의 종노릇하며 사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인간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영적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실 정도로 귀한 존재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신앙 고백을 들으시고 우셨습니다. 우리는 기도, 신앙 고백, 예배 등으로 예수님을 울려보았습니까? 이런 눈물은 드라마를 보며 흘리는 것과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함께 온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통분은 격렬한 감정 상태를 말합니다. 어떤 면에서 분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 외로움, 질병 등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처럼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가’하고 분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막연히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시는 게 아닙니다. 또 단순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부모나 곁에 있는 사람들은 괴로워하며 통곡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고통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우리와 동일하게 감정, 고통 등을 느끼셨습니다. 내가 아플 때 그분도 아파하시고 내가 힘들 때 그분도 힘들어 하시며, 내가 외로울 때 그분도 외로워 하셨습니다.

34절에서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조문하시려고? 예수님은 장례설교를 해보신 일이 없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이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고 물으신 것일까요? 나사로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여러분, 여러분의 문제를 주님께 보여 드리십시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5~58절에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합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사망의 권세에 맞서 대면합니다. 그리하여 죽음과 싸워 승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덤으로 가자’고 하십니다.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합니다.

무덤으로 가신 예수님을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우리의 문제가 아무리 커도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만큼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해결하지 못하실 문제는 없습니다.

주여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기도로 예수님께 간구하면 주님께서 반드시 주님의 때에 주님의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여러분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022년 4월 2일 오전 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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