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2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10:14-15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예수님은 왜 자신을 거듭 거듭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실까요?
1양들의 생명을 자기 생명보다 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
요10:11-122양들을 너무나 잘 아시는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10:14여기서 내 양을 안다는 말은 자기 양의 모습, 특징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양이 남의 양이고, 어떤 양이 자기 양인지, 혹은 새끼를 배었는지 안 배었는지를 아는 그런 정도의 지식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삯꾼도 다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이 안다고 하실 때는 양들의 형편과 처지를 속속들이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양들의 처지에 서서 양들의 입장을 이해해 주고 동정해 준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양을 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창세기33장을 보면 야곱이 20년 동안의 처가살이를 끝내고 처자와 함께 수많은 가축 떼를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형 에서가 부하 400명을 거느리고 죽이러 왔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야곱이 얍복강 나룻터에서 환도뼈가 부러지도록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서 형 에서의 마음이 바뀝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형 에서가 동생 야곱에게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창33:12그러자 야곱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연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청하건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창33:13-14에서는 양들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목적이 있다면 동생과 함께 빨리 가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에서에게 양들을 맡겼다가는 하루아침에 양들을 몰살 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과하게 몰면 양들이 피곤해 쓰러지거나, 병이 들어 쓰러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양 떼의 형편과 처지를 생각했습니다. 급하게 몰면 안되지. 새끼까지 딸렸는데, 어떤 것은 새끼를 배고 있는데, 그러니 한 달이 걸리든 두 달이 걸리든 양들이 가는 대로 천천히 따라가면서 풀도 먹이고 물도 마시게 하자, 혹 새끼를 낳으면 그 새끼가 걸을 때까지 기다려 주고, 어두우면 쉬자.
양들이 형편을 따라 양들의 입장에 서서 양들을 데리고 가겠다는 것이 야곱의 심정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야곱에게서 양들을 이해하고 동정하는 선한 목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그러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얼마나 깊이 알고 계실까요?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완전한 지식)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10:14-15우리는 부부로 오래 살아도 서로가 서로를 모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때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남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13:12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이 자신을 정확히 알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고는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보시는 즉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신 것입니다. 누구의 말을 듣고 아신 것이 아닙니다.)"
요1:47-48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 성에서 여인을 만나셨을 때 이 여인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요4:16-17수많은 남자들과 살았지만 여전히 갈증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아셨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4:13-14세리 삭개오를 만났을 때도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질을 아십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고집이 센지, 그리고 저 사람은 아무리 옳을 것이라도 그런 식으로 강요해서는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도 예수님은 잘 아십니다.
또 어떤 사람은 너무나도 약해서 조금만 무리한 것을 요구하면 쓰러진다는 것도 잘 아십니다.
또 어떤 사람은 너무나 의심이 많고 자기만족에 차서 오랫동안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도 잘 알고 계십니다.
참된 목자는 양의 필요를 잘 압니다. 참 목자는 양이 마른 것을 보고 그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알며, 양이 우는 것을 보고 그가 지금 어느 곳이 고통스러운지를 잘 압니다. 때로는 양이 물을 먹고 싶어해도 물을 먹여서는 안될 때가 있다는 것도 아십니다.
우리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이 실제로는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양식이 필요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약이 필요할 것입니다. 또 돈이 필요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에게 가장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다른 더 중요한 것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전쟁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적에게 붙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양식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에게 잡히는 날에는 모든 것이 끝장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하는 데 있어서 예수님과 우리의 생각은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현실적인 필요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밥 한 그릇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야곱의 형 에서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장자의 자격을 팥죽 한 그릇과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장자의 자격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배가 좀 고프더라도 자기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사울에게 쫓기는 다윗에게는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중요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의 훈련이 더 중요했습니다.
우리는 가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고독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갈수록 나와 너 사이를 갈라놓고 높은 벽을 쌓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군중 속에서 외롭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내 마음을 깊이 알아주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존재 자체를 이해해 줄 수 있는 누군가를 찾고 싶어 합니다. 마음 속에 있는 이야기를 마음껏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전화’라는 상담 전화가 개통이 되자마자 명예 퇴직한 사람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씩 전화로 상담을 해 왔다고 합니다. 그 분들의 처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졸지에 직장을 잃었습니다. 가정에서도 가장으로서의 권위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생활이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알아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니 전화통이라도 붙들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