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8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요9:1-3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요9:1-2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질문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무엇을 질문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신앙 수준과 가치관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 일행이 길을 가던 중에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제자들의 이 질문 속에는 어떤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 전제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맹인이 된 것은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난은 죄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병 환자를 볼 때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죄했습니다. “얼마나 큰 죄를 지었으면 나병에 걸리느냐?”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합니다. “얼마나 큰 죄를 지었으면 저렇게 가난하게 될 수 있느냐?”
현재의 모든 모습들은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현재는 과거의 침전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현재의 모든 모습들을 과거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원인을 찾다가 ‘지금 고난 당하는 것은 과거의 악업 때문이야’ ‘지금 잘되는 것은 과거의 공력 때문이야’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이런 생각을 율법주의라고 말합니다. 율법주의는 모든 원인을 과거에서 찾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설 자리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이루고 나면 교만해지고, 이루지 못하고 어려움에 처하면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요9:3고난이 목적이 무엇이라고요? 왜 맹인이 되었다고요?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 : 죄인 -의인, 저주 - 아브라함의 축복, 가난 - 부요, 질병 - 건강, 실패 - 성공으로 바꾸시는 일을 통해 영광 받으십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 사람의 고난이 과거적인 것이 아니라 미래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고통의 원인을 과거에서 캐보는 것이 아니라 내일 그 사람에게 행하실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영광스러운 일을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와 타종교의 차이점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왜 맹인이 되었습니까? 과거 때문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것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하여 맹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맹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미래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었다는 것이 바로 성경적인 시각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들어가면 사람들의 사고의 틀이 바뀌게 됩니다. 과거 지향적인 믿음에서 미래 지향적인 믿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수세기 동안 죄인들을 가두는 곳을 형무소라고 불렀습니다. 이 형무소라는 말 자체에 무슨 뜻이 있습니까? 죄의 대가를 치루는 곳이라는 인과응보의 개념이 있습니다. 죄인은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무소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19세기 영국에 복음의 열풍이 불어 닥쳤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때 엘리자베스 프라이라는 여자가 전면에 나서서 형무소를 교도소로 바꾸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형무소라는 개념과 교도소라는 개념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교도소는 무엇입니까? 응징이 목적이 아니라 변화가 목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 목적인 형무소와는 달리 교도해서 새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교도소의 개념입니다.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과거의 대가를 치르는 곳이 아니라 미래의 인간을 만들기 위한 곳이 교도소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시각이요,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에게 믿음의 말씀이 들어가면 시각이 이렇게 변하게 됩니다. 똑같이 고난을 당하고 똑같은 어려움을 당해도 해석하는 방법이 다르고, 태도가 다르고, 미래를 대하는 방법이 달라집니다.
"보면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즉, 징계 자체도 과거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미래의 영광스런 모습을 위한 훈련이라는 것입니다."
히12:8을"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나오리라"
욥23:10강조점은 단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금에 있습니다. 왜 단련을 합니까? 미래에 순금같이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성경은 다 미래 지향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내일이 오늘보다 낫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모레가 오늘보다 훨씬 낫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엄청나게 많은 일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미래 지향적인, 성경이 말하는 참된 믿음을 갖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바랍니다. 미래 지향적인 성도가 됩시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사건을 봅시다.
미래 지향적인 사람들은 어떤 자세로 세상을 살아갑니까?
1큰 고난 가운데서도 낙심치 않고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15-17바벨로 포로로 끌려가는 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벨로 포로 생활은 그들을 정결하게 만들어 복된 미래를 만들기 위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미래를 위한 자산이다”라는 것이 믿음의 사람의 시각입니다. 그리하여 현재의 고난 중에도 낙심치 않고 소망 가운데서 미래를 바라보게 됩니다.
토스카니니는 저명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입니다. 그런데 그는 선천적으로 눈이 나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제1 바이올린 주자였는데, 눈이 나쁘다 보니 악보를 볼 수 없어서, 남들이 다 쉬는 시간에도 악보를 외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연주 시점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자기 악보만 외운 것이 아니라 남의 악보까지 다 외웠습니다.
어느 날 공연을 해야 하는데, 폭우 때문에 지휘자가 오지 못했습니다. 누군가가 대신 지휘를 해야 하는데, 단원 중에서 전체 악보를 다 알고 있는 사람은 토스카니니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휘를 기막힐 정도로 잘했습니다. 악보도 안보고 자신의 해석으로 완벽하게 지휘를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놀랐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는 승승장구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현재의 고난이 미래를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의 핸디캡이 미래의 영웅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시각입니다. 오늘의 고통을 내일의 자산으로 삼아야 합니다.
2과거의 경험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감옥에 갇혀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과거에 못했던 것을 이제는 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모르던 것을 이제는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래 지향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했던 것을 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전혀 해보지 못했던 일들, 자신이 감당하지 못했던 큰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정복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큰 일을 합니다. 점점 더 성장하는 인생이 됩니다. 이것이 성도의 모습니다.
맨 처음으로 새로 난 길을 만드는 자들, 영적인 개척자가 되는 것이 바로 성도의 모습니다. 그래서 미래 지향적인 사람과 과거 지향적인 사람은 비교하는 것이 다릅니다. 미래 지향적인 믿음의 사람은 과거와 비교하지 않고 미래와 비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비교를 합니다.
“내가 과거에는 술 먹고 담배 피우고 막가는 인생이었는데, 지금은 은혜를 받아 선량한 사람이 되었다” 이 정도가 아닙니다. “내가 과거에는 술먹고, 담배 피우고, 막가는 인생이었는데, 지금은 은혜를 받아 새 사람이 되었다. 나의 목표는 예수 믿으려면 저 사람처럼 믿어야돼 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인격과 삶에 본이 되는 사람이 되는데 있다”
미래에 목표를 두는 인생, 그것이 바로 미래 지향적인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3순종합니다.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의 현재의 모습은 순종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맹인이 어떻게 합니까?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왜 우리 가운데 이적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이것 따지고 저것 따지고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교회는 교인 숫자가 문제가 아닙니다. 말씀 그대로 순종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냐가 문제입니다. 말씀이라고 하면 목숨을 걸고 순종하는 사람이 나오면, 만 명이 못한 일도 그 한 사람을 통해서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웨스터 민스터 신앙 고백서를 작성할 때,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자세는 “하나님의 말씀이 지지하지 않으면 아무도 자신의 사사로운 견해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아멘 하고 나가는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감당할 사람이 됩니다.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있었습니다. 나병 환자입니다. 엘리사에게 찾아가서 고쳐달라고 하니까 요단강에 가서 7번 목욕하라고 했습니다. 그가 언제 고침을 받았습니까? 그대로 순종했을 때입니다. 순종하니까 나병이 어린아이 살결같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전폭적으로 순종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수십년 믿는다고 해도 “듣고 난 다음에 차차 생각해 보지요” 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 일도 못 이룹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통해 일하시지 않습니다. 듣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듣고 난 다음에 믿음으로 순종할 때 그 사람을 통해서 이적이 나타납니다.
우리에게는 미래의 땅이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 미래의 땅을 차지합니까? 바로 지금 순종하는 자의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