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8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요8:31-33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요8:31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라는 말씀은 예수를 믿는 것만 가지고는 참 제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는 무리와 제자, 두 부류가 있는데, 주님의 말씀에 거하지 아니하면 무리에 불과하다는 말씀입니다.
참 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내 말에 거하면 내 제자가 되고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해야 합니다. 내 뜻, 내 주장, 내 가치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단순히 성경을 많이 듣고 아는 것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나에게 익숙했던 모든 가치관과 생활양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5:24내 말에 거한다는 말씀의 구체적인 뜻은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의 말씀 안에 제한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모든 가치관과 행동을 주님의 말씀 안에 제한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말씀이고, 실제로 행동하는 것은 내 방식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어도 말씀 안에만 머물러 있고 결코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고전4:6우리는 세상에 대해서는 익숙합니다. 그러나 익숙한 삶을 격별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매일 매 순간마다 과연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일치하는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8:32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십니다. 즉, 그들에게 자유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자유라고 생각합니까?
자유에는 외면적 자유와 내면적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자유란 루즈벨트가 말했던 것처럼 출판과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가난으로부터 자유, 공포로부터 자유입니다.
우리가 자유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외면적 자유의 부재를 뜻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유에 관한 헌장을 제정해 선포하고 자유의 여신상도 만들며 보이지 않는 자유를 희구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자유는 외면적 자유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내면적 자유입니다. 내면적 자유란 죄로부터 자유, 죽음으로부터 자유, 악의 세력으로부터 자유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물질과 권력으로부터 자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외면적 자유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영적이고 내면적인 인간 본질의 자유를 강조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당시 사람들은 진정한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33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요8:33참 제자가 아닌 사람들의 특징은 구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못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베드로가 성령의 감동으로 능력 있는 설교를 하자, 그 설교를 들은 사람들에게 어떤 반응이 일어났습니까?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2:37빌립보 지방의 간수가 바울에게 보인 반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바울 앞에 무릎을 꿇고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하고 물었습니다. 이것이 참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일반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그 사람들이 정작 구원에 대해서는 이처럼 절실한 필요성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자유케 한다’는 말씀은 모든 사람이 죄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죄를 지으면 죄의 종이 됩니다. 그리고 죄의 종이 되면 영원한 멸망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게 하리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그들을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에 이르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요8:33유대인들이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말한다고 해서 한 번도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포로 생활을 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앗수르, 바벨론, 그리고 지금 이 말을 하고 있을 당시에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것은 신앙적인 자유입니다. 그들이 여러 번 정복당하고 포로로 잡혀가기도 했지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특권만큼은 빼앗긴 적이 없는 당당한 신앙의 자유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로마 황제가 다스리기 가장 까다로웠던 민족 중의 하나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상당한 자치를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신앙은 로마 황제까지도 인정한 신앙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아직 참 내 제자가 아니며 진리도 모르고 해방되지 못한 노예라고 말하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서, 우리는 그들이 구원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자신의 영적인 절박성, 즉 구원받지 않으면 나는 죽는다는 절박성을 깊이 인식할 때 생깁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2:17병든 사람만이 절박하게 의사를 찾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스스로 의인 체하는 사람은 구원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할 때,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사모하는 것이고, 그에게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의 필요성을 간절히 느끼고 매달릴 때 그 믿음이 바로 진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런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대법원 판사로서 기독 법조인 모임 회장직을 맡으셨던 이용훈 장로님의 간증입니다. 그는 대학 4학년 때 고시에 합격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부러움을 샀습니다. 그리고 어떤 계기로 인해 그 후 10년 동안 열심히 교회를 다녔다고 합니다. 법관으로서 또 신실한 신앙인으로서 모범적인 모습을 보이자 교인들이 믿음 좋은 청년으로 인정했던 것 같습니다. 본인도 스스로 예수를 잘 믿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78년도에 국비 장학생으로 독일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조그마한 대학촌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한국인이 거의 없는 도시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 선교사를 만났다고 합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선교사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이용훈 판사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실례될지 모르지만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예수를 믿습니까?” “예, 저는 지금까지 10년 동안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러자 교회를 다녔냐고 묻지 않고 예수를 믿으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만 말문이 막히게 되었습니다. 그 질문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선교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가 보니까 선생님은 예수를 믿으시는 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선생님은 중생 받은 교인 같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중생을 받습니까?”
“집에 돌아가셔서 죄를 회개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시고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선생님의 마음에 아주 희한한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그 기쁨이 일어나면 선생님이 중생을 받으셨다는 것을 믿어도 됩니다.”
선교사의 말이 가슴에 와서 콱 박혔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회개하라는 선교사의 말이 계속 머리 속에서 맴돌았습니다. 그래서 회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회개할 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대학 4학년까지 공부에만 정신을 쏟았고, 그 후 젊은 나이에 법관이 되어 지금까지 충실하게 살아서 그런지 그렇게 특별히 회개할 거리가 생각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회개할 거리를 찾느라 끙끙 앓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생각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초등학교 3, 4 학년 때 학교에서 짚을 가져오라는 숙제를 받아서, 이웃집에 쌓아 놓은 볏가리에서 몇 단을 뽑아 학교에 가지고 간 것이 생각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어릴 때 짚단을 뽑아 학교에 가지고 갔습니다. 용서해 주세요.”하면서 회개를 시작했답니다.
어쩌면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교회를 10년이나 다녔는데 막상 회개를 하라고 하면 무슨 잘못을 크게 범한 일이 없기 때문에 마땅히 죄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여러분의 마음에 절실하게 마음에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드러나게 죄를 지은 적도 없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잘못을 한 적도 없기 때문에 회개하고 구원 받으라고 하면 그것이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유대인들처럼 “내가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나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거야”하는 식의 반응을 여러분 역시 얼마든지 보일 수 있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그런 자유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