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8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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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그들이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8:7-11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그들이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8:7-8

그들은 집요하게 대답을 요구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단 한 마디의 말씀만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이 여인이 죄가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지만, 죄를 간과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과 인정하는 것은 다릅니다.

둘째, 모세의 율법이 틀렸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여인이 죄를 지은 것과 모세의 율법이 옳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를 숙여 땅에 뭔가 기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분노하여 돌을 집어 들고 서 있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한 사람씩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요8:9

율법에는 돌을 들어서 가장 먼저 치는 자가 그 일에 증인이 됩니다. 그는 이 처형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만약 누가 “왜 이 여자에게 돌로 쳐 죽였느냐?”고 묻는다면 그 모든 이유를 설명하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 제일 먼저 돌을 던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무도 먼저 돌을 던지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모두들 다른 사람이 돌을 던지면 그 때 돌을 던질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자기가 제일 먼저 돌을 던지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음모를 꾀해 간음한 여인을 희생물로 삼아 끌어오고, 사주 받은 수많은 군중이 흥분한 가운데 예수님께서 한마디 말씀하시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여인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말씀의 위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 있어 좌우의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우리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것입니다.

빛이 오면 어둠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인간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것입니다. 짧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입을 통해 나가는 순간에 자신을 멋있게 위장했던 교활한 종교인들도 양심에 가책을 느꼈고, 분노하던 군중도 슬금슬금 도망가 버렸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영적 권위입니다.

어느 누구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예수님의 영적 권위가 느껴졌을 것입니다. 영적 권위가 있는 사람을 쳐다본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수모와 치욕의 순간들이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에 사라져버렸습니다. 일순간 정죄, 고발, 분노, 심판의 분위기는 반전되었습니다.

태풍이 지나고 다시 평정을 되찾았습니다. 죽음이 지나고 부활의 아침이 왔습니다. 저주와 어둠과 죽음이 떠나고 한 순간에 안식과 평안의 빛이 온 것입니다. 이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8:10

이 말씀에서 중요한 단어가 두 개 나옵니다. 고발과 정죄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고발하고 정죄합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계12:10

참소하고 정죄하는 것이 마귀의 특기입니다. 성도님들은 누구를 고소, 고발하는 일은 절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발, 고소, 정죄, 비판 등은 마귀의 주특기입니다. 11절 말씀에서 여인은 대답합니다.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8:11

엄청난 공포 속에 떨고 있던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눈을 떠 사방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예수님이 죄를 너무 가볍게 다루고 계시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가끔 보면 간음한 여인을 다루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가지고 기독교의 핵심을 잘못 짚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자를 얼마나 관대히 대하고 계시는가? 간음을 범했는데도 그것을 죄로 인정하지 아니하시고 부드럽게 여자를 위로하면서 용서하시고 있지 않은가? 기독교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기독교의 본질은 죄를 책망하는데 있는 것도 아니요, 사람들의 가슴을 칼로 찌르면서 회개하라고 소리치는 데 있는 것도 아니라, 용서하는 데 있다. 죄를 묻지 말고 용서해라. 죄를 덮어 두고 무조건 용서해라.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너무 죄 문제를 들춰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처럼 비뚫어진 관용의 사상이 기독교 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미국 같은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의 사상을 지배하는 무서운 세력이 되어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언젠가 타임지 커버스토리에서 ‘부정은 유전적인 것일 수 있다’는 제목으로 이 문제를 크게 다룬 적이 있습니다. 요점은 마음으로든 행동으로는 간음을 범하는 것은 인간이 유전적으로 타고난 것이기 때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간음을 범해도 그것은 내 탓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타고난 유전자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몸이 유전적으로 그런 죄를 범할 수 밖에 없도록 프로그램화 되어 있는데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뭐가 문제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가 서구의 많은 지성인들과 젊은이들을 지배하고 있고 우리 사회에도 그 풍조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조차 그와 같은 사고에 물이 들고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죄를 가볍게 다루신다는 생각이 이런 풍조를 확산시키는데 한몫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단 한 분도 이런 말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죄를 가볍게 다루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신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정죄의 도구로 사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도구가 되어야지 정죄의 도구가 되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정죄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죄도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하여 정죄하지도 아니하였습니다. 그들도 정죄하지 못하도록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정죄하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웃을 정죄하면 안됩니다. 판단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이 정죄하는 도구가 되면 안됩니다. 나 자신을 살피고, 이웃을 구원하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해 가을, 지방의 한 교도소에서 재소자 체육 대회가 열렸습니다. 20년 이상 복역한 모범수의 가족들을 초청하여 함께 하는 자리를 마련한 특별한 행사였습니다.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던 체육 대회는 어느덧 마지막 순서만 남겨 놓고 있었습니다. 그 순서는 재소자가 부모님을 업고 운동장을 한 바퀴 달리는 ‘효도 관광 달리기 대회’였습니다.

행사 진행을 위한 준비가 시작되자 시끌벅쩍하던 운동회 분위기가 갑자기 숙연해졌습니다. 푸른 수의를 입은 선수들이 부모님을 업어야 하는데, 정작 부모님들은 아들의 등에 업히려 하지 않았습니다. 야위어진 아들의 어깨를 보니 차마 그 등에 업힐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교도관이 어렵사리 출발 신호를 하여 곧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모두가 조금이라도 골인 지점에 늦게 들어가려고 애쓰는 이상한 모습이 연출되었습니다. 선수들이 단 1초라도 더 부모님을 업고 싶어서 천천히 달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1등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아들의 모습에 등에 업힌 부모님은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였습니다. 세상은 그들은 죄인이라고 정죄했지만 부모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님의 눈에는 죄인이 아닌 그저 너무 야위어진 아들의 모습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아무리 죄인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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