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5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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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6:36-37

기적을 보았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믿는 게 아닙니다.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고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체험하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고자 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떡을 위해서는 열심히 쫓아다녔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생을 위한 떡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육신의 양식으로는 나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는 있지만, 이웃의 고통은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육신의 양식만을 좇는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기도 합니다. 하지만 생명의 떡은 나와 함께 이웃의 생명까지 살릴 수 있습니다.

생명의 떡은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살려 우리 이웃의 아픔까지 돌아보게 합니다. 그래서 이 떡을 맛본 사람들은 이웃을 향한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전도에 힘쓰게 됩니다. 이웃의 고통을 해결할 힘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께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손으로 만질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표적을 보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믿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는 이유는 믿을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비극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범죄하는 그 순간부터 사람들에게 임했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도대체 얼마나 부패했길래 자기 힘으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것일까요? 이것은 본질상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일컬어서 진화론자라고 합니다. 이 진화론을 하나님처럼 떠받들고 있는 사람들이 오늘날 많이 있습니다. 진화론을 믿는 학자들이 원숭이가 사람의 조상이라면 어떤 분명한 가시적인 상관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진화론자 두 사람이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원숭이를 대상으로 실험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삐끼라고 이름을 붙인 침팬지를 자기 집에 입양을 해서 6년 동안 말을 가르쳤습니다. 원숭이 중에서 제일 지능이 높다고 하는 침팬지가 6년 후에 하는 말이라고는 맘, 파파, 컵, 업 이 네 마디뿐이었습니다. 그것도 자세히 귀를 기울여야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학자들은 원숭이가 정말로 사람의 조상이라면 학습에 기울인 노력에 비례해 최소한의 기대 수준은 만족시켜 줘야 할 텐데 전혀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을 보니,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침팬지의 구강을 조사했습니다.

어느 언어에서나 말을 하려면 세 가지 모음인 이 에 우는 발음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침팬지에는 이 에 우를 발음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침팬지에게는 이 에 우를 발음할 수 있는 인두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가르쳐도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질상의 문제입니다. 본질상 문제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도무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 자손으로 태어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서 아버지, 예수님을 향해서 주여 하고 고백을 못하는 이유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인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전적 타락, 전적 무능이라고 합니다.

혹시나 내가 믿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믿을 수 있지 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12:3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4:6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믿지 않는다는 것은 인식의 문제, 감각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리가 아니라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참 진리라도 인간에게 믿지 않겠다는 마음이 있는데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꺾이기 싫은, 순종하기 싫은, 굴복하기 싫은, 끝까지 나를 고집하고 주장하며 이기려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표적을 보지 못하고도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20:29

누가 이런 복을 받게 될까요? 하나님이 택하신 자

예수님을 믿을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사람도 하나님께서 택하시면 모두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면 도망가고 욕을 하며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기도 합니다. 이슬람권에서는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형이 동생을 죽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시면 불가항력입니다.

사람이 전적으로 무능해서 예수를 믿을 수 없다고 한다면 세상에서 믿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일이면 전 세계적으로 수십억의 신자들이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드립니다. 이런 이변에 대해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6:37

즉, 아버지께서 주님에게 주시는 자들은 주님께로 가서 예수 믿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누가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시는 자들만이 믿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자들이 누구인지는 요17:6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기도하실 때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유였던 자들을 예수님께 주셨고, 예수님께서는 주신 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부를 자신의 소유로 선택하셨고, 그들을 예수님께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 중에서 자기 소유가 될 자들을 언제 선택하셨습니까?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1: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곧 온 우주 만물이 생기기 전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선택하셨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선택하셨다는 말씀은, 세상이 있는 어떤 개념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를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초월자라는 사실입니다. 그 분에게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 있어서 시간은 언제나 현재입니다. 그러므로 태초가 우리에게는 수만 년 전일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께는 항상 현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 전에 나를 선택하셨다는 말을 우리 입장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창세 이전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선택하셨다면 어떤 조건에 의해서 사람들을 선택하셨을까요? 엡1:5을 보면 하나님이 기쁘신 뜻대로 선택하셨다고 합니다. 다른 조건은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서 선택하셨습니다.

우리의 형편을 보아서 어쩔 수 없이 내린 선택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선한 구석이 있어서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하신 뜻대로 무조건 선택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처럼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분이 선택해서 부르신 사람들을 보면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엉뚱한 데가 있습니다.

소설가 부크너가 이것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해서 사용하신 사람들을 부크너는 얼룩덜룩한 잡종들 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잡종은 순종에 비해서 질이 떨어지고 값도 떨어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선택한 사람들은 전부 얼룩덜룩한 잡종들 같습니다.

왜 인간성이 좋고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정직했던 에서가 아니고, 비열한 사기꾼과 같은 야곱을 택하셨을까요? 술 먹고 벌거벗은 채로 드러누워 있는 민망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인 노아를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선택하셨을까요? 어째서 사람을 죽여 놓고 미디안으로 도망간 모세를 끝까지 추적해서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도록 하셨을까요?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예수 때문에 유대교가 망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예수교를 완전히 말살시키겠다고 작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이미 선택해서 자기 소유로 삼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도 예수를 미워하였던 바울도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 앞에 서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를 거꾸러뜨리고 눈을 멀게해서 자신에게로 끌고 오셨습니다.

바울처럼 똑똑하고 자기 의를 고집했던 사람도 하나님의 선택 앞에서는 무력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결국은 평생 자기가 그토록 미워했던 예수를 위해 사는 사람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불가항력적인 은혜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불가항력은 은혜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거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옥까지 가서 택하신 자를 데려오십니다. 아무리 고집스럽게 거부해도 그분께서는 은혜의 줄로 동여매십니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 망설이지 말고 돌아오십시오. 인생의 반환점에서 머뭇거리지 마십시오. 속히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매를 대서라도 강제로 데려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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