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4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요5:19
그러므로 :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분노하므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신 일로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분노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시니까 더욱 크게 분노했습니다.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 하여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죄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영적 무지와 교만이 사람을 얼마나 어리석게 만들고 하나님 앞에 범죄하게 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롬10:2-3예수님의 말씀은 올바른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바꾸고 고쳐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인간적인 생각과 기준으로 판단하려고 하면 의심이 들고 진리 안에 거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복음 중의 복음이며, 비밀 중의 비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유대인들에게 대답하신 말씀이지만,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시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를 저질렀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정죄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이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고 하시며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거짓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로 진실로 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될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시려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요5:19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시든지 자기 스스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그대로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십니다.
조금 전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38년된 병자를 치료하신 것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알아보기도 전에 먼저 예수님께서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사랑을 받기 전에 자신이 먼저 다른 사람을 사랑한 것은 하나님께서 늘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그 귀한 사랑 나타나 내 영혼 거듭났네
주 내 맘에 늘 계시고 나 주의 안에 있어
저 포도나무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누구든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은 항상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먼저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우선권을 놓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먼저 사과를 하고 먼저 용서를 빌어야 용서해 준다면 이것은 진정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먼저 사랑하십니다. 먼저 찾아오셔서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항상 먼저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늘 이렇게 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렇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먼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내게 먼저 회개할 마음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할 마음을 주시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도 먼저 사랑할 마음을 듬뿍 주십니다. 우리가 그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감사를 받으십니다.
기도할 마음이 생겼을 때에 주저하지 마십시오. 그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입니다. 기도할 마음이 생겼는데도 하나님이 내 기도를 받으실까? 아니면 받지 않으실까? 생각하면서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도할 마음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은 사랑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깨달아서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경우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은혜의 자리로 나아오게 하고 기도하게 할 때에는 주저하거나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고 계신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먼저 은혜를 베푸시는 일에 있어서, 안식일이라고 하여 중단하시는 것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습니다. 바쁘다거나 안식일이라고 하여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오는 자를 물리치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금까지 해 오신 것을 그대로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봅니다. 아들이 하는 것은 다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그대로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첫째로 아버지와 아들의 진정한 관계는 일치와 투명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숨기는 게 없는 관계입니다. 아버지의 생각과 뜻이 아들에게 전달돼 그대로 진행되는 관계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아들은 아버지의 행하시는 것을 행한다’라는 말이 얼른 실감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그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좋지 않습니다.
물론 아버지를 존경하고 그 뜻에 맞게 사는 아들이 있긴 합니다. 그런데 사춘기를 거치면서 아버지가 하는 것마다 반대하는 게 아들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상처받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자상’입니다. 이것은 죄를 지은 인간의 모습니다. 아버지가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반항하고 거부하며 아버지의 가슴에 못 박는 불행한 관계로 발전한 것입니다.
오늘날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경제적인 것이 대부분입니다. 용돈, 학비, 생활비를 주니까 그나마 연결돼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필요로 하는 것은 유산일 뿐입니다. 어떤 아들은 아버지가 죽기 전에 유산을 내 놓으라고 조릅니다. 그런 아들이 성경에 나오는 둘째 아들 탕자입니다. 유산이란 아버지가 소천한 다음에 갖는 것이 원칙인데 미리 빼앗아 갑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 성경에서 탕자라고 합니다. 불행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일반적으로 아버지는 이런 아들에 대해 사랑 대신 미움, 축복 대신 저주를 품게 됩니다. 사회적으로 덕망이 있는 아버지라도 집나간 아들로 인해 고통을 겪는 것이 우리 시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 기쁨,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소원해지면 대화가 단절됩니다. 대화가 없으면 만남이 없습니다. 만남이 없으면 관계가 끊어집니다. 이런 불행이 아버지가 병들어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것을 주변에서 종종 봅니다.
예수님의 경우에 아버지 하나님과의 자신과의 관계가 우리가 세상에서 흔히 보고 경험하는 것과 전혀 다른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이 다르듯이,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렇게 특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 8절에서 빌립이 예수님께 ‘아버지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시오’하고 말합니다. 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 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10절에서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언어, 생각, 감정은 모두 하나님과 같았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인하여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예수님의 의식에는 순수하게 아버지의 뜻이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우리의 생각, 말, 감정이 예수님의 것과 일치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인간은 언제나 반항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며 거절하는 본성입니다. 가장 본질적인 마음의 상처는 거절당하는 데서 오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 자신을 배척하고 용납하지 않으면 감당을 못합니다. 미움과 분노가 생깁니다.
여기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반항하는 체질’이 없어지기를 축원합니다. ‘분노하는 체질’이 없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상처로 생긴 모든 것들이 녹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이 미움보다 크고, 포기가 소유보다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변화되듯, 스스로 자신을 바꿀 때 주변 사람들이 변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중보기도입니다.
21~22절에서 한 가지를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많이 회개했습니다. 우리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맞춰 목사, 성도들의 비전이 동일해야 합니다. 같은 꿈, 생각, 행동….
1백 명이 모여 싸우면 1만 명같이 여겨지고, 1만 명이 모여 한마음이 되면 하나같이 느껴집니다.
생각이 다르면 부부 사이도 복잡해집니다. 부자나 형제간에도 복잡해집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1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