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9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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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요5:10

병 나은 사람은 베데스다 연못에 38년 동안 누워있던 병자입니다.

예수님이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있던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시자 벌떡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을 본 유대인들은 몹시 흥분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흥분은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38년된 불치병이 한 순간에 나았다는 데에 대한 놀라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계명을 어기고 자리를 들고 걸어 다니는 일을 했다는 데에 대한 격분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랜 고질병으로 시달렸던 병자의 고통과 그가 병을 치료받고 느끼는 기쁨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들의 율법적인 기준만을 중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이 일을 문제시하여 정죄하기 시작했습니다.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이러한 정죄에는 그들만의 명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십계명 중 네 번째 계명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안식일에는 주님께 예배드리고 찬양을 드리고 영광 돌리고 세상의 기쁨과 육신적인 쾌락을 금하라는 뜻이며, 오직 주님을 위한 날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적인 유대인들은 계명의 본뜻을 이해하고 따르기보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될 일만을 찾는 일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유대인 장로들의 전통을 모아서 기록한 ‘미쉬나’에는 안식일에 금하는 39가지 조항이 들어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집에서 쓰는 깔개를 옮겨도 안식일을 범한 것이 됩니다. 안식일에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1Km 이하로 이동하는 것만 허락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규정을 지키기 위해 회당 1Km 반경 안에 집을 지어 거주했습니다.

이렇게 율법주의적인 유대인들은 규정을 구체화시키고, 조항을 많이 추가시켜서 예수님 당시에는 무려 613개나 되었습니다. 613개 중에서 해서는 안되는 것이 365개였고, 해야 되는 것이 248개였습니다.

원래 안식일에 물건을 들고 다니지 못하게 한 것은 느헤미야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때에 내가 본즉 유다에서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며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여러 가지 짐을 지고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음식물을 팔기로 그 날에 내가 경계하였고 또 두로 사람이 예루살렘에 살며 물고기와 각양 물건을 가져다가 안식일에 예루살렘에서도 유다 자손에게 팔기로 내가 유다의 모든 귀인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 너희 조상들이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서 우리 하나님이 이 모든 재앙을 우리와 이 성읍에 내리신 것이 아니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안식일을 범하여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더욱 심하게 임하도록 하는도다 하고 안식일 전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갈 때에 내가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나기 전에는 열지 말라 하고 나를 따르는 종자 몇을 성문마다 세워 안식일에는 아무 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장사꾼들과 각양 물건 파는 자들이 한두 번 예루살렘 성 밖에서 자므로 내가 그들에게 경계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 밑에서 자느냐 다시 이같이 하면 내가 잡으리라 하였더니 그후부터는 안식일에 그들이 다시 오지 아니하였느니라"

느13:15-21

느헤미야 당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안식일에 대한 의식이 없어져서 그들은 안식일에도 성내에 물건을 가지고 들어와 장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안식일에는 물건을 들고 다니지 못하게 했고 그것을 어기는 자는 처벌했던 것입니다.

안식일에 물건을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한 율법의 원래 의도는 안식일 하루는 세상 모든 일에서 벗어나 온전히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온 마음과 정성을 다 드려 예배드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안식일을 이 수준에서 기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이라는 것으로 모든 유대인들이 하나로 묶고자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이념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바로 이 이념을 안식일에서 찾았습니다.

안식일을 자기들이 하는 일에서 해방되어 하나님만을 섬기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 날을 지키는 것으로 참된 유대인임을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이 날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반 유대 주의자였습니다. 그들은 매국노였고, 이스라엘을 사랑하지 않는 자였으며, 이방인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혐오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유대주의 운동에 동참하지 않는 매국노와 같은 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에게 자기 자리를 들고 가게 하신 것은, 그가 분명히 나았고 이제는 더 이상 병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있어서 이 오래된 자리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38년 동안 계속 이 한 자리만 깔고 누웠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는 이 자리를 오랫동안 사용하면서 애지중지했을 것입니다. 그는 이 자리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그 자리를 들고 가라고 하십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이 병자의 자리가 필요 없었습니다. 이제 그는 건강을 되찾았으니까요.

누군가가 완전히 건강해졌는데도 옛날에 사용하던 주사기나 온도계, 약을 먹던 컵 등을 소중하게 자기 머리맡에 둔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자기가 완전히 나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에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말씀은 한평생을 병으로 시달려온 그에게 진정한 믿음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이것이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안식일에 물건을 들고 갈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누구를 위한 안식일이냐?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누구를 위한 안식일이며 누구를 위한 종교입니까?

여러분이 신앙을 갖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 자신이 마음에 평안을 얻고 더 잘 되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려 드리기 위해서입니까?

종교가 자기에게 무엇인가 유익을 주고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들의 어떤 규칙이나 생각의 틀이 깨뜨려 지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이 병자에게 자리를 들고 가라고 하신 것에 대하여 대단한 분노를 나타내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이 행위가 유대인들을 하나로 묶는 정신을 깨뜨리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의사 협회에서 정부 방침에 화가 나서 진료를 거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자기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집단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의사가 진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들의 고통을 보고 불쌍히 여겨서 환자를 진료하러 갔다면 그들은 그 사람에 대하여 분노를 느낍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이 하나가 되기로 한 것을 그가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미 의사들의 적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날이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을 하나로 묶는 정신적인 이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빠진 신앙이요, 하나님이 없는 안식일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얼마든지 하나님 없이 번창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그들을 어떤 정신적인 끈으로 묶어 놓기만 한다면 하나님 없이, 예수님 없이 얼마든지 자기들 중심으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릅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몰아내고 자기들끼리 목사나 장로가 되어서 얼마든지 사람들을 모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성경적이고 정통적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쫓아내고 있습니다. 오직 이념의 틀이 있을 뿐입니다.

영국의 저명한 기독교 사상가인 C. S. 루이스는 그의 저서 ‘피고석의 하나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피고인이 재판장에게 가듯 하나님께 나아갔다. 하지만 현대인의 경우에는 그 역할이 뒤바뀌었다. 인간이 재판장 자리에 앉아 있고 하나님이 피고석에 앉아 계신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전쟁, 가난, 질병을 왜 허용하셨는지 조리 있게 설명해 달라고 요구한 뒤, 하나님이 이에 대해 얘기하시면 아주 이해심 많은 재판장인양 귀를 기울인다. 물론 인간이 하나님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재판이 끝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인간이 판사석에 앉아 있고, 하나님은 피고석에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자신의 기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구원까지도 자신의 재판대에 올려놓습니다. 다른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자기 마음대로 ‘그 사람은 구원받지 못했어’라며 하나님께 속한 구원에 대해 판단합니다.

참된 복음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나타냅니다. 진정으로 자기 죄를 깨닫고 죄 용서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위하여 종교를 믿어온 사람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이 자기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는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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