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7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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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요5:1-4

"보면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마4:23을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4:23

가르치시며,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예수님의 3대 사역)

특히 사복음서는 20% 가량을 병 고치는 기사로 채워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약자를 돌보시며, 소외된 자의 편에 서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등 인간의 본능적인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영적인 문제만 해결하시는 게 아니라, 먹는 것과 입는 것 그리고 질병도 해결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내어 주신 깊고 넓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상처받고, 병들고, 귀신 들린 사람에게 긍휼과 치유와 애정을 보이신 사랑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사랑 즉 예수님의 사랑은 관념적이지 않고 구체적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입니다. 두 번째 표적은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말씀으로 낫게 하신 것입니다. (원격 치료사건)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세 번째 표적을 보게 됩니다. 병에 걸린 지 38년이나 돼 더 이상 희망이 없는 환자를 고쳐주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병 고치시는 일은 간단한 문제입니다. 병을 고치는 원리는 생명입니다. 생명은 어떤 죽음, 절망도 이깁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님을 통해 죽은 자에게 전달돼 살아나며, 귀신이 나가고 병을 낫게 하는 기적들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같은 영적 권위, 생명의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요5:1

각 복음서마다 나름대로 특징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그때에󰡑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마가복음은 󰡐곧󰡑, 󰡐바로󰡑, 󰡐즉시󰡑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누가복음은 󰡐때가 되어󰡑라는 독특한 표현을 씁니다.

요한복음은 󰡐그 후에󰡑라는 단어를 자주 기록합니다. 요한복음에 7번, 요한계시록에 9번 사용한 것을 보면 사도 요한이 즐겨 쓰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1절 말씀에서도 󰡐그 후에󰡑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한 가지 특징은 예수님께서 주로 갈릴리에서 활동하셨는데,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신 때는 언제나 명절과 관련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이 지키는 큰 명절 세 가지는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입니다.

본문 말씀은 아마 세 절기 중 하나일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에서 사역하시고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오십니다. 이 때 예루살렘 성문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에는 여러 개 문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인 󰡐양의 문󰡑을 통과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요5:2

서울에 4대문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에도 여러 개의 문이 있었습니다. 서쪽에는 망대문이 있고, 남쪽에는 힌놈 골짜기로 가는 쓰레기와 배설물을 버리는 문이 있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똥문입니다. 동쪽에는 실로암 샘으로 내려가는 샘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쪽에는 성전에 이르는 문으로 제물인 양과 염소가 들어가는 양문이 있었습니다.

느헤미야 3장을 보면 느헤미야가 무너진 성벽을 재건할 때 가장 먼저 수축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북쪽에 있는 양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느헤미야가 양문을 먼저 수축했다는 사실에서 중요한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을 회복하려면 제일 먼저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우리 신앙의 문 가운데 무너져 내린 부분이 있습니까? 우리 삶에 어려운 부분들이 있습니까? 그때마다 회복의 시작은 예배의 문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삶의 질서를 잃어버렸습니까?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어디로 가야 할 지 방향을 모를 때 제일 먼저 우리가 생명을 걸고 시작해야 하는 것이 바로 양문 수축입니다. 다시 말해 예배를 회복하는 것부터 시작하면 모든 얽힌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 양문 바로 옆에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습니다.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벧이 집이고 헤세드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베트와 헤세드가 합쳐져서 베데스다 곧 은혜의 집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베데스다에는 한 가지 전설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요5:3-4

즉, 못에 고인 물이 소용돌이칠 때 그 못에 제일 먼저 들어간 사람은 병이 낫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물이 소용돌이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난치병으로 고생하는 많은 병자들이 이 못가에 모여서 물이 소용돌이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성경을 보니까 많은 병자와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이 못 가에 모여 있었다고 합니다.

물이 소용돌이치기만 하면 제일 먼저 들어가서 병을 고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긴장된 모습으로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던 곳이 바로 베데스다였습니다. 그런데 이 베데스다는 일종의 딜레마가 있고 모순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한번 곰곰히 생각해보길 바랍니다. 물이 소용돌이칠 때 제일 먼저 들어간 사람이 병이 낫습니다. 그런데 물이 소용돌이칠 때 가장 먼저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소경입니까? 절뚝발이입니까? 혈기 마른자입니까? 아니면 좀 더 건강한 사람들입니까? 아마도 건강한 사람일 것입니다.

중환자는 먼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건강한 사람일수록 제일 먼저 들어갈 가능성이 큽니다. 많은 병자들 가운데 중병이 걸린 사람들, 암에 걸린 사람들, 일어나지 못하는 앉은뱅이 같은 사람들은 전혀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간단한 병들, 즉 무좀 걸린 사람들, 쌍꺼풀 수술 후에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아줌마, 귀 뚫다가 귀에 염증 생긴 사람이 먼저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모순입니까? 꼭 필요한 사람들은 접근할 수도 없고, 별로 절박하지 않은 사람들, 들어가나 안 들어가나 똑같은 사람들이 먼저 들어갈 수 있는 그런 모순된 장소가 바로 베데스다였습니다. 그러므로 베데스다는 치유의 장소이면서도 꼭 필요한 사람들은 절대로 치유될 수 없는 모순을 가지고 있던 그런 장소였습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못에 들어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병이 낫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들어가서 병이 나을 수 있습니까? 건강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건강하면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베데스다의 딜레마였습니다. 사실 이 베데스다의 딜레마는 온 인류의 딜레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율법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 율법대로 순종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영적으로 건강하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적으로 파산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7:18,19

이것이 인간의 딜레마입니다. 순종하고 싶은데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술을 끊고 담배도 끊고 싶은데,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주께 나와서 기도하고 싶고, 열심히 봉사하고 싶은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 그런 연약한 존재들이 바로 인간입니다.

이 베데스다는 율법 앞에 서 있는 인간을 묘사합니다. 얼핏보면 베데스다에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철저한 절망이요, 또 좌절을 알려주는 저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고 합시다.

“네가 어떤 사람과 함께 100미터를 뛰어서 그 사람을 이기면 구원을 주겠다”

가능성 있는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묻습니다.

“하나님, 누구랑 같이 뛰어야 합니까?”

“너의 상대자는 칼 루이스나 우사인 볼트다”

우리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끝없는 절망감에 빠지고 도저히 희망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인간 총알 칼 루이스나, 우사인 볼트를 이길 수 있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18초인데 칼 루이스는 컨디션이 나빠도 10초안에 100미터를 뛰는 사람입니다. 도저히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구원의 방법이라고 붙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방법입니다. 율법이 제시하는 구원의 방법은 우리에게 구원을 줄 수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못한 모순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율법의 방법을 포기한 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먼저 들어가겠다고 하는 경쟁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저는 연약합니다. 저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갈 2:16에

“사람의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으려고 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고 우리를 붙들어 달라고 간구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의 발버둥으로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전적인 무능력자들이기 때문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을 믿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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