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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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요4:5-7

수가라 하는 동네는 가버나움으로 가는 길과 나사렛으로 빠지는 길이 서로 갈리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예수님이 피곤하고 목이 말라 앉으셨던 그 우물은 그 성 사람들에게는 생명줄과 같았습니다. 그 지방은 강우량이 적어서 온 성이 그 우물의 물을 마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우물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5절을 보면 야곱이 요셉에게 준 우물이라고 했으니까 2,000년 이상 사람들이 사용하였던 우물입니다.

이 우물은 수가성에서 2Km 이상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자의 몸으로 무거운 물지게를 지고 왕복 4Km 이상의 길을 걷는 다는 것은 보통 힘들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주목해야 할 사실은 예수님이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전날 오후에 예루살렘을 떠나 그 다음날 정오까지 비지땀을 흘리며 그 뜨거운 광야 길을 걸어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여인이 12시쯤 물 길러 나온다는 것을 미리 아신 주님께서는 그 시간에 맞추기 위해 쉬지 않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니모데모와 같은 어떤 유명한 인사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이해할 만합니다. 그러나 수가성의 여인은 그럴만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는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또 하나의 장벽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 장벽은 바로 여성 차별이었습니다. 여성은 거의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유대의 남자들이 하루에 세 번씩 반복하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 기도문 가운데 제일 마지막에 감사 기도가 나옵니다.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방인과 노예와 여자로 태어나지 않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사마리아라는 장벽과 여성이라는 장벽은 결코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와 여자라는 장벽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한 여인에게 다가가십니다. 두 가지 장벽을 뚫고 가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한마디로 요약하면 모든 장벽을 깨뜨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장벽을 뚫고 나가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장벽을 깨뜨리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이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십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2:16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이 들어갔는데도 우리 가운데 장벽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복음이 들어간 것이 아니고, 진정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장벽이 수없이 많습니다. 경제적인 장벽, 인종적인 장벽, 신분적인 장벽이 있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예수그리스도가 없는 세상에 대해 정확한 분석을 했습니다.

“사회라는 것이 무엇이냐? 역사라는 것은 무엇이냐? 인간 대 인간의 끊임없는 계급투쟁이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투쟁하고 있고, 강대국과 약소국이 투쟁하고 있고,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이 투쟁하고 있다. 이 갈등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맞는 지적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갈등을 깰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복음에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최대의 악은 노예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경 어디를 보아도 “노예 제도가 잘못 되었다. 노예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구절이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식자들은 이런 불만을 품습니다. “도대체 성경은 왜 이 사회의 모순에 대해서 침묵하는가? 성경 속에 정의는 존재하는 것일까?”

신약 성경에 빌레몬서라는 짧은 책이 있습니다. 한 장으로 된 성경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입니다. 이 오네시모의 주인이 바로 빌레몬입니다. 오네시모는 주인에게 많은 손해를 끼치고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로마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만나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회심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바울은 이 오네시모를 굉장히 사랑했습니다. 빌레몬서에 보니까 이 오네시모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내가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

자신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오네시모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하면서 빌레몬에게 쓴 편지가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빌레몬에게 사도 바울은 “노예 제도가 잘못되었소. 그러므로 당장 오네시모를 해방시키시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빌레몬서를 읽어보면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빌레몬, 사랑하는 빌레몬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당신에게 내가 오네시모를 돌려보내겠소. 오네시모가 빚진 것을 내가 다 갚아주겠소. 그런데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오네시모는 변화되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이 오네시모를 당신의 종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받아 들이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빌레몬서입니다. 사도 바울의 접근 방식은 얼음을 깨부수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태양으로 얼음을 녹게하는 것이었습니다. 빌레몬의 마음 속에서 노예 제도를 가능케 하는 모든 악한 구습들이 뿌리 채 녹아져 없어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접근입니다. 결국 빌레몬과 오네시모 사이에 형제의 관계가 성립됩니다. 그리스도인의 힘이 여기에 있습니다. 형제의식이 생기기 때문에 벽이 무너집니다.

왜 우리 가운데 벽이 무너지지 않습니까? 형제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는 영적인 시각이 없기 때문에 벽들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복음으로 성도 가운데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이 벽들을 깰 수 있는 권능의 사람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서로 나누어지는 일이 있다고 하면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심각한 문제만 안게 됩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이 벽들을 허물고 나아갈 때 교회는 강력해졌고, 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중세기만 해도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는 엄청난 벽이 있었습니다. 서로 접근할 수 없는 벽이 있었습니다.

종교 개혁이 무엇입니까? 성직자와 평신도의 벽을 없애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이다”라는 만인 제사장주의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이 벽이 깨어짐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이 교회 안에 돌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장벽을 깨뜨릴 때 진정한 부흥이 나타난 것입니다.

웨슬리가 일으킨 부흥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교회가 부자들에게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따라서 웬만큼 잘살지 않으면 교회에 갈 수 없었습니다. 웨슬리는 이것을 매우 가슴 아파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광산으로 나갔습니다. 아름다운 교회에서 설교를 한 것이 아니라, 사과 궤짝을 놓고 그 위에 보자기를 덮어 강대상을 삼아 말씀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분의 벽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럴 때 17세기 말 영국에 대단한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장벽이 무너질 때 부흥이 일어납니다.

19세기 미국 부흥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과거에는 백인들만 예수를 믿어야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19세기 말 미국에서 부흥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유색인들에도 복음을!” 그것이 그들의 모토였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들고 동양으로 동양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인도로, 일본으로, 중국으로 가게 되었고, 따라서 19세기를 ‘선교의 세기’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벽이 허물어 질 때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안에 빈부 때문에 나누어진 장벽이 있습니까?

신분으로 인하여 생긴 장벽이 있습니까?

배운자, 못 배운자 때문에 생긴 장벽이 있습니까?

나이 때문에 나누어진 장벽이 있습니까?

이런 것 때문에 하나가 될 수 없다면 이것은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아픔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무너져야만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교회가 될 줄 믿습니다.

역사를 보면 교회가 언제 약해졌습니까? 교회 안에서 끼리끼리 모일 때 교회는 약해졌습니다. 배운 사람은 배운 사람끼리 모이고, 부자는 부자끼리 모일 때 교회는 교회로서의 영광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부자들만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토하시겠다고 했습니다. 유럽의 귀족 교회들은 다 문 닫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이가봇’의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의 모델은 무엇입니까? 모든 계층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고, 나이에 상관없이, 지방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교회의 목표인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하나가 되기 위한 길은 간단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죄인으로 만나야 합니다. 내가 부자로 나오고, 내가 배운자로 나오고, 내가 명예 있는 자로 나오니까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전부 다 하나같이 죄인입니다. 죄인으로 나와야지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 변화 받아야 될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목사도 장로님도 성도님들도 다 변화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모두가 다 죄인으로 나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아니면 내 죄가 씻겨질 길이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주님 앞에 바로 서게 될 줄로 확신합니다. 우리는 이 죄인 의식을 가지고 또 다른 죄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되게 하는 힘으로써 세상을 두렵고 떨게 만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의 사역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외적인 사역입니다.

외적인 사역을 성령의 은사라고 하는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서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몰아내고, 마귀의 능력을 멸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내적 사역입니다. 내적 사역은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을 변화시켜서 우리 안에 예수의 모습이 드러나게 만드는 것. 그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만드는 것이 바로 성령의 내적인 사역입니다.

성령께서 내 심령을 다스려 주셔서 성령의 열매,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 되면, 차별과 장벽이 없어지고야 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모든 차별, 모든 장벽을 깨뜨리고 하나가 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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