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6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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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여러분 계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암탉이 혼자 낳은 계란은 무정란이고, 수탉의 씨를 받은 것은 유정란입니다. 이 둘은 겉으로 봐서는 모릅니다. 깨어 봐도 모르고, 삶거나 영양가 분석을 해봐도 전혀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미 날개 밑에 들어가서 20일이 지나면, 결정적으로 차이가 생깁니다. 한 계란에서는 생명이 나오고, 다른 계란은 썩어버립니다.

우리 모두 똑같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예수의 생명이 수정된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60평생 80평생 살 때는 전혀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이렇게 질문 합니다. 여러분 안에는 예수의 생명이 있습니까? 로마서 8장 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님 안에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내게 무슨 일이 생깁니까? 예수님 안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의 세력인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합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거듭남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거듭남입니다. 영의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거듭남입니다. 다시말해, 거듭남은 내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자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특징은 자라는 겁니다. 성장하지 않는 생명은 죽은 겁니다.

예수 믿는다는 본질을 성경에 나오는 말씀으로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5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러면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오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장 14, 1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4-15

예수님은 생명이 어떻게 사람에게 들어오는가 하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구약의 한 사건을 예로 듭니다. 민수기 21장 4절에서 9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홍해를 건너게 한 뒤 광야에서 훈련을 시키십니다. 하나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여 훈련시킨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신8:15-16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고귀한 뜻을 깨닫지 못하고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비스러운 것은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에 처하자 은혜를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작은 고난 앞에 큰 축복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하나님 앞에 대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은 독사에 물립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정신을 차리고 교만과 불신앙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지 못한 채, 광야 훈련이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던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찾아가서 우리가 잘못했으니 하나님께 중보기도해서 살려달라고 간청합니다. 하나님은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응답하십니다. 장대 위에 구리뱀을 만들어 매달아 그 뱀을 바라보는 사람은 다 살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상식에 맞지 않는 방법을 주셨을까요? 여기에는 비밀이 있습니다. 먼 훗날 온 인류의 죄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살을 찢기고, 조롱 당하여 죽을 것이니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구원의 비밀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을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라고 하는 요3:16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16절을 다음과 같은 각도로 다시 보겠습니다. 구원의 주체는 누굽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대신 인간이 주인이 된 겁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내가 역사를 주관하는 겁니다. 이는 말씀과 정반대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여러분의 구원의 주인공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십니다. 그러면 구원의 대상은 누구십니까? 󰡐세상󰡑입니다. 여러분, 주어와 목적어를 바꾸지 마십시오. 이것이 타락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입니다.

구원의 동기는 무얼까요? 사랑입니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입니다. 복음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6절)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이처럼 사랑하십니다. 이처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이보다 더한 사랑은 어떤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최고의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에 늘 도와주는 친척 한 분이 계시다고 봅시다. 쌀이 떨어지면 쌀을 사 주고, 병이 들면 약을 지어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사람이 더 큰 어려움에 빠져 완전히 죽게 되었을 때, 이 분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 알거지가 되면서까지 도와주었다면 ‘이처럼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를 사랑하시되 하나님이 가지신 모든 것을 희생하실 정도로 나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본 적도 없습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합니다. 사랑을 받을 만한 아무런 공로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내어놓으실 정도로 사랑하십니다.

오늘 참으로 중요한 말씀이 ‘세상을’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원래 성경에서 ‘세상’이라는 말이 사용될 때에는 늘 나쁜 뜻으로 사용됩니다. 썩고 부패하고,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악한 본성을 가진 인간 사회를 말할 때 세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썩고 부패하고, 늘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스르는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사랑을 받을 만한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은. 이 세상의 가장 추악한 인간까지 다 사랑하시고 그들의 영원한 행복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실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은 너무나도 커서 인간이 세워 놓은 어떤 제약도 막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지금까지 선하게 살아온 사람, 악하게 살아온 사람, 성공한 사람, 실패한 사람의 구별이 통하지 않습니다.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아무리 악하고 무능하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대상입니다. 오늘까지 어떤 파렴치한 삶을 살았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데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조차도 현재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를 위하여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과연 우리가 얼마나 큰 곤경에 빠져 있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시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건강이 좋지 못한 것이 어려움이라면 훌륭한 의사를 보내시든지. 아니면 병원에 갈 수 있는 돈을 주시면 될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어 가는 것이 문제라면 옛날에 하셨던 방식대로 만나를 내려주시면 될 것입니다. 조그만 도랑 하나 고치기 위해 대형 포크레인을 동원한다면 모든 사람이 비웃을 것입니다. 우리가 빠진 곤경이 얼마나 크고 엄청난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희생하기로 작정하시고 독생자를 보내셨을까요? 인간이 빠진 곤경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사느냐 못사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운명과 관계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야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독생자까지 보내실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운명이 달려 있는 심판이 이들 모두에게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모두 영원한 지옥의 심판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아주 짧은 순간 동안 인간들은 웃고 떠들면서 지냅니다. 모든 것이 자기 것인 양 욕심을 부리며 삽니다. 그러나 그런 행복은 카메라의 플래시처럼 짧은 한 순간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내내 끝없는 어둠과 저주와 고통만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아시면 서도 쌀이나 주시고, 약이나 주신다면 정말 진정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이 세상에 있는 것을 다 빼앗아 가신다고 해도 그 영원한 문제에 대하여 해결해 주시는 것이 참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물론 이 아들은 온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십니다.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고 스스로 높아진 모든 것을 쳐부술 자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것을 목적으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왜나 하면 심판을 위해서라면 아무 것도 하시지 않고 가만히 두어도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손을 댈 필요가 없습니다. 가만히 두면 모든 것이 다 영원한 심판 속으로 빠지게 되며 단 한 명도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영원한 세상이 아닙니다.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우리에게 임시로 주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영원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유예 기간에 불과합니다. 마치 사형수들이 죽기 전에 고기 국을 배불리 먹으면서 영원히 살 것처럼 떠들어대는 것과 같습니다. 시간이 되면 사형 집행인의 손에 이끌려서 형장으로 가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의 이름을 믿으면 이런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일까요?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그 이유는 아들을 믿는 자는 아들 안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과 직접 상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들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아들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를 영원히, 단 한 번에 심판하셨습니다. 그의 죄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는 죄였습니다. 죄를 보아서는 영원히 죽어야 하지만, 하나님은 독생자의 순종을 보시고 아들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죽습니다. 결국 나라는 존재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의미를 가집니다.

이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를 상대해야 합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직접 상대해야만 합니다. 그는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믿지 않는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외에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살아날 수 있는 다른 길이 있으면 그 길을 택하십시오. 그러나 다른 길은 없습니다.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방법은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는 것입니다.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무한한 사랑을 받는 사람 편에서 조건은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그 사랑을 내게 베풀어주셨어도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믿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독생자를 주신 것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입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입니다. 지식인이냐, 무식한 사람이냐, 부자냐 가난한 사람이냐가 아닙니다. 조건이 있다면 ‘믿음’입니다.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가 아닙니다. “당신 예수를 믿습니까?” 라고 하지 “당신 예수를 아십니까?”라고 하지 않습니다. 안다고 구원이 오는 것이 아니고, 믿어야 접촉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너무나 크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의 지식으로는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절대 하나님을 다 알려고 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다 알려고 하면 오만입니다. 내가 이해해야 믿을 수 있다고 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여러분의 지식과 경험으로 하나님을 다 알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만큼 알 뿐입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은 독생자를 보내신 겁니다. 결과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소극적인 결과는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요. 적극적인 결과는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요점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것을 믿고 받아들인다면 거듭남은 이미 당신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은 거듭났습니까? 이것은 중요한 뿌리입니다. 내가 아직 도덕적으로 미숙하고, 신앙의 경륜이 짧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생명이 있는가 없는가 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의 기초를 분명히 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습니다. 거듭나셨습니다. 그 기초 위에 여러분의 믿음을 키워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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