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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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3:1-3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신 것은 뉴스거리 중의 뉴스거리였습니다. 그것은 분명 특종이었고, 모든 사람의 시선을 그분에게 쏠리게 하고도 남았습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의 성전 일에 개입해서 거기 있는 물건을 뒤엎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그 분은 자신이 이 집 주인의 아들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계시면서 많은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유감없이 밝히신 것입니다. 이때보다 더 분명하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신 일이 없었습니다.

모든 유대인의 관심은 오직 이분에게 쏠렸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오직 한 사람, 니고데모만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요3:1

니고데모에 대한 첫 번째 설명은 바리새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바리새인이라는 뜻은 분리주의자입니다. ‘나는 너와 다르다’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기 때문에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확실히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아주 엄격하고 도덕적으로 살려고 애썼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당시에 이들이 6천 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가장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세력이었고, 이들 중에서 대 율법학자나 경건한 지도자가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니고데모가 바로 그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두 번째, 유대인의 지도자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이들은 산헤드린 공회 의원을 의미합니다. 산헤드린 공회 의원은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모든 분야에서 법을 집행할 수 있고, 경찰권과 권력을 가진 단체입니다. 그들은 사형 외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1절은 니고데모가 유대인이면서도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1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선생이라는 칭호를 받는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요19장을 보면 니고데모는 재정적으로도 부유한 사람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요19:39-40

이 말씀을 정리해 보면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라는 종교적 그룹과 유대인의 관원이라는 권력그룹에 속해 있고 지성인이었으며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배고픈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요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밤에 찾아왔다는 것이 뭐 그리 대수로운 이야기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요즘처럼 전깃불이 밝은 세상이라면 밤이나 낮이나 별 문제가 안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당시는 밤이면 횃불이나 등불 없이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았다는 사실을 두고 동정을 하는 사람도 있고, 비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동정론을 펴는 쪽에서는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은 이유는 예수님이 낮에는 너무 바쁘셔서 찾아가 봐야 잠깐 인사할 시간 밖에 없을 것 같으니까 밤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밤에 찾아간 것은 지혜로운 선택이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비판론자들은 다르게 이야기 합니다. 니고데모는 굉장한 신분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 나라의 최고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불과 60-70명 안에 들어가는 저명인사였습니다.

그 당시 유대 나라의 지도층은 대부분이 젊은 나사렛 예수를 경계의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럴 때 대낮에 예수님을 찾는 것은 체면에도 문제가 있었고, 만에 하나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밤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비판적인 시각이 옳다고 봅니다. 니고데모는 사람들 앞에서 티를 내기 싫어서 밤에 찾아온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많은 분들이 니고데모처럼 자신의 체면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릴 때 박수를 힘차게 치거나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하는 것을 어색해하고 부끄러워합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점점 더 큰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박수를 치거나 손을 높이 올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지게 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며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높였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그렇게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왜 니고데모 같은 사회 지도층 인사가 예수님을 찾아왔을까요?

그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를 가로막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그 일을 보고 마음을 열었습니다.

‘나는 아직 공개적으로 이 분의 제자가 되지는 못하겠어. 그러나 이 분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능력이야, 분명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야.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야. 그렇다면 나는 이 분의 말씀을 들어야해,’

얼마나 그의 마음이 열려 있습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참고로 듣습니다. ‘하나님 나의 생각은 따로 있습니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십시오. 참고삼아 듣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참고삼아 들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우물거리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나의 뉴스거리로 듣는 것이 아니라 내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들으러 나오는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3:3

이 말씀은 어떻게 들으면 동문서답처럼 들립니다. “당신은 위대한 선생님입니다”라고 인사를 하는데, 그것도 나이가 많고 유대사회의 지도층인 니고데모가 예수님과 같은 연하의 무명청년에게 인사를 하는데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대답하시니 말입니다. 니고데모는 속으로 몹시 당황했을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관원이며,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선생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가장 많이 알고 있고 가장 많이 가르친 사람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시니 얼마나 충격적이었겠습니까?

주님이 나를 인정하기보다 아주 무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나의 본심을 달아보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에 합격하지 못하면 그 사람의 신앙은 엉터리입니다. 겸손한 자가 아니면 하나님의 생명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내 안에 알량한 자존심이 있으면 예수님의 풍성한 생명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 왔을 때 그는 엘리사가 집 앞까지 나와서 자기 몸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해 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종을 시켜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라는 것입니다.

아람에 좋은 강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왜 하필이면 요단강입니까? 나아만 장군은 너무나도 자존심이 상하여 돌아가는데, 종들이 한번 순종해 보라며 만류합니다. 그것보다 더 어려운 일을 시켜도 할 텐데, 그것을 못할 게 무엇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놓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무 어려운 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너무 쉬운 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내 자존심이 구겨질 정도로 나를 낮추시기 때문에 생명을 놓쳐 버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전에 나의 자존심을 달아 보십니다. 주님 앞에서 무한히 자신을 낮출 수 있는 그의 고백이 진정한 고백입니다. 낮아져도 완전히 낮아지지 않으면 그는 아직 이 생명을 소유하지 못한 자입니다. 가장 비천해 질 수 있습니까? 그것이 은혜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영영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 속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 ‘거듭남’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기독교 사상은 ‘거듭남’이라는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거듭남은 하나님 나라의 열쇠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고 깨닫고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은 거듭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 말을 당시 유대인 지성의 최고봉이었던 니고데모가 못 알아들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은 니고데모가 알고 있는 모든 개념에는 없는 전혀 생소한 개념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주어진 말이 아니라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 거듭났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이 새롭게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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