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8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요1:35-41
세례 요한에게 제자들이 몇 명이나 있었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성경에는 본문 말고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는 데가 없습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요1:40이와같이 안드레와 익명을 요구한 한 사람만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을 따름입니다. 익명을 요구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세례 요한의 제자는 안드레와 요한뿐입니다.
저는 안드레와 요한은 위시하여 그 수를 알지 못하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평범한 젊은이들이 아니었다고 봅니다. 한참 꿈 많고 혈기 왕성하고 의분에 불타는 나이에 세례 요한에게 달려가서 세례를 받고, 그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회개를 외쳐 댄 그들이 어떻게 평범한 젊은이들일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그들은 다혈질적인 갈릴리 출신이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해서 세례 요한에게 마음이 끌리게 되었는지는 갈릴리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나 사회적인 여건들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곧 팔레스타인 땅에 살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거의 600여년 동안이나 외세의 억압과 지배를 받아 왔습니다. 앗수르를 비롯하여 바벨론,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이집트, 시리아, 로마로 이어지는 강대국들의 계속된 지배 아래서 그들은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북부에 위치한 갈릴리 지방은 비옥한 옥토가 펼쳐져 있는 농경 지대였습니다. 풍부한 농산물에다가 육로와 수로가 잘 갖추어진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을 정복한 모든 강대국들은 갈릴리에 눈독을 들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다른 어느 지역 사람들보다 더 많은 고통과 착취를 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유명한 역사학자인 요세푸스에 따르면 세례 요한이 활동하던 그 당시 갈릴리 지역에는 204개의 촌락이 있었으며, 각 촌락에는 약 15,000명 정도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수치가 얼마나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300만 명이 넘는 주민들이 그 지역에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많은 잡족들이 그곳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그러니 갈릴리의 사회 구조가 얼마나 복잡했겠습니까?
비록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이방인과 피를 섞는 그런 최악의 상태까지 간 것은 아니지만 사방에서 유입된 온갖 잡된 문화들로 인해 순수한 혈통과 전통을 지키기가 극히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삶을 가장 고달프게 했던 것은 무거운 세금이었습니다. 그들은 두 가지 세금을 내야 했는데, 종교세와 조세가 바로 그것입니다. 종교세가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대제사장이나 부패한 집권자들이 맘대로 부과한 세금이라면, 조세는 로마 정부가 부과하는 세금입니다. 불행한 일은 두 가지 세금이 제각기 부과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종교세를 부과하는 쪽도 제 맘대로요, 조세를 부과하는 쪽도 삭개오와 같은 세리들을 앞세워 제 맘대로 세금을 무겁게 매겼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얼마나 불만을 품고 살았을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비옥한 토지라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별로 넓지 않은 농토를 경작하며 빠듯하게 살아가는 농민들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몇 마리 잡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어부들의 입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100만원의 수입 중 60만원 이상이 세금으로 나간다고 한번 상상해 보라는 것입니다. 어쩌다 세금을 내지 못하고 밀리기 시작하면 땅도 배도 모조리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농사짓던 사람이 땅을 빼앗기면 절대 빈곤으로 떨어집니다. 절대 빈곤으로 떨어진 사람들은 일당 품팔이 노동자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한번 이렇게 추락하면 다시 원상 복구가 잘 안되는 것이 그 당시 세상이었습니다. 이렇게 코너에 몰리면 가는 데가 뻔하지 않습니까? 사방에 우글거리는 도적 떼에 가담하거나 무력으로 세상을 뒤집어 놓고 싶어하는 저항 세력에 몸을 던지게 됩니다.
더욱이 갈릴리 사람들은 기질상 환상적인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돈보다 명예를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옳은 일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다혈질적인 기질이 매우 강했습니다. 따라서 착취를 당하면 당할수록 그들을 자생적인 저항 세력들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저항 세력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는 엣세네파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현실 도피주의자들입니다. 정치가 너무 부패하고, 종교마저 악취가 진동할 정도로 썩어 버리자 세상에 대한 매력과 기대를 완전히 잃어버린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을 등지고 사해 바다 주변에 공동체를 만들어 놓고 은둔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말씀과 기도 생활을 하고 노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오시는 날에는 세상이 완전히 새로워질 것이라는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력을 가지고 저항하지 않고 은둔 생활을 택한 것 역시 일종의 비폭력 저항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단체에 빠지는 젊은이들이 많았습니다.
또 하나는 열심당이었습니다. 이것은 가롯 유다가 소속되어 있었던 단체입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거의가 무력 혁명을 통해서 세상을 뒤집어 엎자는 과격분자들이었습니다.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어수선 하고 숨막히는 현실을 앞에 놓고 의협심이 강한 젊은이들이 얼마나 속이 탔겠습니까? 오죽 고통하며 탄식했겠습니까?
세상이 악할 때 사람들은 흔히 세 자기 반응을 보입니다. 에세네파 처럼 아예 세상을 등지고 살든지, 아니면 열심당처럼 생명을 걸고 싸우든지, 아니면 나 몰라라 하며 먹고 마시고 즐기는 데만 탐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 가지 선택 모두 옳은 길이 아닙니다. 무력에 호소하는 것은 잘못하면 또 하나의 악을 저지르게 됩니다. 도망가서 산속에 숨는 것은 비겁한 행동입니다. 밤낮없이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을 가장 저질의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당시 갈릴리 젊은이들 가운데 의식을 가진 자들은 이 세 가지 중 어떤 길도 마음대로 택할 수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등장한 것은 바로 이처럼 어려운 때였습니다. 그는 회개를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답답해하던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보았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메시지에 매료되어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안드레와 요한 역시 그러한 젊은이들 중 하나였습니다.
36 예수의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사명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새 : 노래할 때
꽃 : 꽃을 피울 때
과수 : 열매를 맺을 때
선수 : 최선을 다하여 경기를 할 때
사람 : 사명을 다하는 삶을 살 때
사도 바울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우리 모두에게는 주 예수께 받은 사명, 생명보다 귀한 사명이 있습니다. 사명을 위하여 삽시다. 시시한 것 때문에 울지 말고 사명 때문에 우는 사람이 됩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합시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며 삽시다.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자랑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삽시다.
복된 소식을 전하면 나도 살고 이웃도 삽니다.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복음입니다. 복음은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고 운명을 바꿉니다.
두 제자가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위대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내 제자를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재산은 줄 수 있지만, 사람을 주는 것은 어렵습니다. 좋은 사람은 자신이 데리고 있고 싶습니다. 정말 아끼고 좋은 사람은 다 자기 곁에 두고 싶습니다.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제자를 다른 사람에게 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예수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신의 인생의 목표였기 때문에 자기 제자를 예수님께로 기꺼이 다 넘겨드렸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나의 증거로 사람들이 예수를 좇아야 합니다. 나를 좇게 하지 말고 예수를 좇게 하는 삶. 나의 제자를 삼지 말고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단의 특징은 교주를 좇게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라온 두 제자를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이 질문은 큰 의미를 갖습니다. 예수님은 요한과 안드레를 잘 알고 계셨고, 그들이 왜 자기를 좇아오는 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물으셨을까요? 그들에게 다시 한 번 자기를 좇아오는 목적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왜 나를 찾느냐? 로마 정부를 전복하고 이 사회를 개혁하고 싶으냐? 그래서 날 좇느냐? 만약 그렇다면 너희들은 돌아가야 한다. 난 혁명가가 아니다. 너희가 왜 나를 좇느냐? 밤낮 없이 기도하고 밤낮없이 성경 묵상하면서 세상을 등지고 경건 생활을 하는 수도승으로 알고 있느냐? 그렇다면 너희들은 돌아가야 한다. 나는 수도승이 아니다. 아니면 빵을 위하여 너희가 나를 찾느냐? 권력을 위해서 나를 찾느냐? 나는 그런 것을 너희에게 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잘 생각하고 나를 좇으라” 이것이 바로 “무엇을 구하느냐?”라는 질문에 담긴 의미입니다.
저는 이 질문이 주님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 왜 교회에 다닙니까? 많은 사람들이 떡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다가 나중에는 전부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표적과 기사를 좋아해서 좇다가 흥미가 없어지자 모두들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잘못된 목적을 가지고 주님을 좇는 사람은 결국은 떠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주 물어야 합니다. 나는 왜 예수를 좇고 있는가?
예수님의 질문을 받고 요한과 안드레는 매우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그런 질문을 던지시리라고는 차마 예상을 못했던 것 같습니다. 엉겁결에 그들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랍비여 어디 어디 계시오니이까?”
무엇을 구하느냐는 질문에 어디 사느냐고 묻고 있으니 이게 무슨 말 같지 않은 대답입니까? 아마 그들의 말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 지금 어디에 기거하고 계시는지 알려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시간을 내어 조용할 때 찾아가서 뵙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하시는 데가 있기는 했겠지만 고정적인 주거지를 가지고 계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부터 주님은 자기 집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디 있노라고 일러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읽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사람들은 자신의 집이 좋거나 볼만하면 와 보라고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보이기가 부끄럽고 초라하면 오라고 말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와 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집에 와보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떳떳하게 우리 집에 오십시오. 내가 사는 곳에 와 보십시오.
그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갔을 때가 열 시 쯤이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시간으로는 오후 4시에 해당됩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무렵이었지만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밤이 깊도록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었던 것 같습니다.
그날의 감동이 너무 벅차고 뜨거운 것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요한은 그 시간이 십시쯤 되었다는 것까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7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를 마음에 영접한 사람은 그날의 시간까지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한과 안드레를 보십시오. 얼마나 흥분했으면 날이 새자마자 자기 형제 베드로에게 달려가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41절)라고 소리를 질렀겠습니까?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나자 그가 자신들이 그토록 찾던 메시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에게든지 이 사실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뜨거운 감격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정말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는지, 그 분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였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내가 만난 예수님을 주위 사람들에게 얼마나 간절히 말하고 싶어하는 가를 따져 보면 되니다.
좋은 일은 입을 꾹 다물고 숨겨 놓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 너무 좋아서 사람들을 붙들고 이 사실을 말하고 싶어 한다면 그 사람의 신앙 고백은 진짜입니다. 그러나 자꾸 숨기려하고 예수 믿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신앙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안드레는 자기 형제 시몬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흥분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는 특별한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맡겨진 사명입니다. 우리는 가족들부터 일가친척과 이웃들까지 모두 주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내가 만난 예수를 전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만난 예수를 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년 10월 9일 오전 7: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