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6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요1:24-27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고 했는데 그들은 누구입니까"
요1:24에서"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요1:19바리새인들이 왜 그들을 보냈을까요? 책잡으려고
바리새인들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책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때 세례 요한이 어떻게 했던가요?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요1:20-23요한은 진실만 말했습니다. 결코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주의 일을 거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싸우면 안됩니다.
나의 대적을 바로 알고 싸워야 합니다 (다윗 - 골리앗과 싸우려고 할 때 형이 다윗의 마음을 괴롭게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형과 싸우지 않고 대적 골리앗과 싸웠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시시한 것에 인생을 낭비하면 안됩니다.
주의 일을 하다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의 태도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행5:41주의 일을 하다가 보면 타인의 평가로 인하여 괴로울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평가에 초연하십시오. 주만 바라 보십시오.)
사도 바울의 경우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고전4:3-4"보겠습니다."
요1:25을"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요1:25이 말은 그의 영적 권위에 도전하는 무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요1:26-27동문서답처럼 들리지 않나요? 네가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고 질문하는데 세례 요한은 예수님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하나님의 명령, 자의로 세례를 베푼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요1:33그러나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 일을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요1:26-27왜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세례를 베푼다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그들이 증명을 요구하면 증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방법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마21:23-25"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마21:27세례 요한 또한 계속 책을 잡아도, 책잡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을 다했습니다.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요1:26-27당시 유대 나라에서는 주인의 신발을 묶고 풀고 하는 것은 천한 노예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유대 나라의 랍비들은 스승과 제자 관계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무리 제자가 스승을 존경한다고 할지라도 다른 일은 몰라도 선생의 신발을 묶고 풀어 주는 일 만큼은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천한 종이나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자신을 가리켜 예수님이 신발 끈을 풀어 줄만한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때는 나는 그분의 종이 될 자격조차도 없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와같은 세례 요한의 말과 자세를 보면 그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 되신 예수님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알려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어떻게 하든지 작아져서 사람들 앞에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비치기를 원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어떻게 이토록 겸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감히 인간이 하나님과 자기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세례 요한은 철저하게 인간이었습니다.
창조자와 피조물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거룩한 자와 죄인을 어떻게 나란히 놓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세례 요한은 피조물이요 죄인입니다.
자기와 나이가 같은 청년 예수를 아무 것도 모르고 보았을 때는 막연히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에게서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영광을 보자 그는 무릎을 꿇고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가 자기를 종보다도 못한 존재로 여길만큼 겸손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세례 요한은 주님을 위해서 생명을 걸고 마지막까지 충성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자기 머리가 소반에 담기는 모욕과 수치를 당할지라도 그는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자기는 그 영광 앞에 한 줌의 흙에 지나지 아니하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서슴없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까? 그렇다면 세례 요한처럼 작아질 것입니다. 예수님 닮기를 원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은 철저하게 낮아지고 겸손해질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은 한국 교회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위대한 분이십니다. 만일 1885년 4월 7일,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는 행복을 누리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전혀 개화되지 않은 우리나라에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아프리카의 케냐보다도 가난했고, 몹시 위태로웠습니다. 그런 때에 언더우드 선교사님이 한국에 첫발을 들여 놓았던 것입니다. 그는 열심히 한국말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해지자 한국 사람처럼 입고, 한국 사람처럼 먹고 마시면서 벽촌 이곳 저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때로는 나귀를 타기도 했지만 하루에 수십리를 걸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어떤 시골 주막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 옛날 외국 사람을 구경하기 힘든 시절, 이상하게 생긴 서양 사람이 밥을 먹고 있으니까 얼마나 신기한 구경거리였겠습니까? 마을 사람들이 거의 다 몰려들어 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버릇없는 청년이 옆 사람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 그것이 밥을 다 먹을 줄 아네” 그 말을 들은 언더우드 박사가 밥을 먹다가 웃으면서 이렇게 대꾸를 했습니다. “예, 국도 먹을 줄 압니다.” 그러자 그 청년이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야, 이것봐라. 그것이 말도 할 줄 아네” 언더우드 선교사님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예, 글도 쓸 줄 압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을 가리켜 “그것” 하면 얼마나 모욕적인 말입니까? 짐승이나 물건을 가리켜 그것이라고 하지 사람을 가리켜 누가 그런 말을 씁니까? 그럼에도 언더우드 선교사는 모욕을 달게 받으면서 복음을 위하여 낮아지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중에 그의 이런 겸손한 모습에 감동을 받은 그 청년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언더우드 박사님이 이같이 낮아지고 겸손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봅시다. 이상하게 예수를 오래 믿는 사람들 가운데는 교만한 분이 계십니다. 자기를 너무 추켜세워 사람들이 크신 예수님을 볼 수 없도록 그 앞을 가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그 분들이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희미하게 보았던가, 아니면 전혀 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세례 요한처럼, 언더우스 선교사님처럼 주님을 증거하고 높이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상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자기 신발끈을 풀고 매어 주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위대한 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의 일을 하다가 책을 잡으려는 사람들이 몰려와도 그들과 싸우지 않고 잠잠하게 자신의 사명만 다했습니다. 예수만 나타내고 자신은 철저하게 낮추었습니다. 우리 또한 주의 일을 하다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잠잠히 사명만 감당하고 예수님만 나타내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