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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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자기가 만든 물질 속으로 하나님이 들어오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위대하고 영원하고 무한하신 그분의 위상을 포기하고 자기가 만든 인간 속에, 자기가 만든 물건과 같은 형태로 인간이 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열쇠는 하나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으면 성경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다 풀립니다. 그것을 믿지 않으면 의심이 생기고 갈등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성경을 보기 시작하면 신약에 나오는 모든 기적, 구약에 나오는 모든 기적, 이해되지 않던 말씀이 모두 다 해석됩니다.

예수는 본래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는 부활과 승천도, 마지막 날 역사의 주인으로 다시 오시는 재림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신데. 역사를 주관하고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분이요,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이신데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뛰어 넘는 것이 어려우시겠습니까?

요한복음 1장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는데 거기에 세 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운데 거하시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대개 많은 사람들이 절대자이신 하나님은 우리와 떨어져 멀리 계신 분으로만 생각합니다. 나같이 천하고 더럽고 죄 많은 인간의 삶 안에 들어오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십니까?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죄인 가운데 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장 14절 말씀에서󰡐육신이 되어󰡑는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우리처럼 육체를 입고 사람이 되신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요, 핵심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의 본질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이 되셔서 자기를 포기하신 것이 구원의 본질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자기 포기입니다. 기독교가 세상 속의 영웅으로, 세상의 권력으로 등장하면 이미 기독교 자체의 모습은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말씀을 성경적으로 보면 구약에서부터 찾을 수 있는 데 이것이 성막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막에 들어간 사람은 짐승을 죽여서, 피를 뿌려서, 죄를 씻어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통해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제사장은 양이나 염소, 송아지를 죽여서 그 피를 가지고 성막에 들어가서 그곳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요, 하나님께 용서받는 장소요, 회복되는 장소요, 구원 받는 장소요,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얻는 장소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막을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막을 통하지 않고, 예수님이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성막이 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말씀 안에는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고, 짐승의 피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죄 없으신 당신의 피를 흘리심으로 성막의 휘장을 가르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14절에서 알 수 있는 두 번째 증거는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이요󰡑에 나타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영광의 광채가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영광󰡑이라는 말은 󰡐빛󰡑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빛이 아니라 하나님의 빛을 예수의 얼굴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영광의 빛󰡑이 없다면, 그분은 보통 인간일 뿐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예수의 얼굴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는 것입니다.

‘빛󰡑은 그림자도 어두움도 없습니다. 죄가 없습니다. 빛은 빛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는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는 어두움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는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습니다. 인간의 얼굴에는 우울함이 있고, 어두운 그림자도 있고, 어떤 때에는 웃고 있어도 고독한 모습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얼굴은 아주 진실한 것 같지만 때로는 뭔가를 감추며 거짓을 말할 때도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두 세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얼굴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빛이요, 영광입니다. 그 영광은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분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중에서 성자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아들의 영광󰡑이라는 말의 원어를 좀 더 다른 각도에서 보면 󰡐독특한 영광󰡑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라고 하는 것은 독특한 위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는 것은 다른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하고 특이한 영광이 예수님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완벽한 미인의 얼굴을 보면 그에게 빠져 들어갑니다. 그렇지만 천사 같이 예쁜 얼굴의 미인도 마음 속에는 흉악한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얼굴이요, 죄가 없는 얼굴입니다. 그분의 얼굴은 영광의 얼굴이며, 독생자의 얼굴이요, 독특한 얼굴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누구든지 그 얼굴을 보면 감격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이󰡐예수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의 독생자의 영광의 광채 안에 여러분이 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예수 믿는다는 말입니다.

세 번째,󰡐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에는 두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생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 독생자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 속에는 두 가지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은혜와 진리󰡑입니다.

‘은혜󰡑는 쉬운 말로 조건 없이 주어지는 사랑입니다. 영원한 사랑, 조건 없는 사랑, 무제한적인 사랑, 항거할 수 없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이런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이 무조건적으로 우리에게 쏟아지는 것입니다.

저는 통영 근방의 납도라는 곳에 사는 모녀의 얘기를 듣고 감동을 했습니다. 혼자 힘으로는 살아 갈 수 없는 56살된 정신지체 1급 장애자인 딸과 단 둘이 사는 일흔 다섯 노모의 이야기였습니다. 늙은 어머니는 도시에서 살면 딸을 잃어버리게 될까봐 섬으로 이주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전기조차도 없는 곳에서 딸을 위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일흔 다섯의 그 할머니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건강한지 모릅니다. 백치나 마찬가지인 딸은 어머니가 없으면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딸에게 밥 세끼를 따듯하게 해 먹이고, 불에 델까, 물가에 갈까 애지중지 합니다. 아들 다섯은 다 할머니 곁을 떠났지만, 딸 하나를 위해서 인생을 던져서 외딴 섬에서 고독하게 단둘이 살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목사도 없는 교회가 있었고, 할머니는 항상 거기서 기도를 드립니다. 󰡐내가 죽으면 이 딸을 누가 돌보나?󰡑 마지막까지 딸을 위한 기도를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살만한 가치가 없는 나 같은 죄인을 낮이나 밤이나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영광에는 이렇게 막을 수도, 조건도 없이, 절대적인, 희생적인, 일방적인 사랑을 쏟아주는 은혜가 있습니다.

또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는 󰡐진리󰡑가 있습니다. 󰡐진리󰡑는 󰡐사실󰡑이라는 말입니다. 거짓이 없고 과장이 없고 속임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의 저울은 다 속임수가 조금씩 있습니다. 인간의 학문과 지식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얼굴은 진리요, 진실입니다. 얼굴에 은혜와 진리가 영광가운데 있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십니다.

은혜와 진리는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알 수 있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 외에 다른 길을 하나님이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하면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더 깊이 알고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 진리는 너무나 그 차원이 높고, 깊고 넓어서 우리 지성으로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좁은 마음에 다 담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의 충만은 지식에 넘치는 충만입니다. 이것은 저울로 달 수 있는 양이 아닙니다. 무한한 충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진리가 쌓이면 쌓일수록, 진리에서 솟는 은혜의 샘은 강을 이루며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는 데는 끝이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의 충만은 하나님 자신의 무한함과 광대하심을 가리키는 충만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더 알기를 바라고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와 진리는 다함이 없기 때문에 절대로 질리거나 권태를 느끼지 않습니다. 언제나 새롭습니다. 언제나 보배롭습니다.

은혜와 진리의 충만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예는 사죄의 은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를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수사학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가 과거에 지은 죄를 생각하면서 가장 큰 죄인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는 스데반을 죽인 죄인이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죄인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자신을 세상에서 구원받을 가능성이 가장 희박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죄인의 괴수를 불러 용서하실 뿐 아니라 영광스러운 복음의 사도로 삼으시고 세상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넘치는 은혜입니까? 바울은 이런 죄인 의식과 감격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롬5:20에 나오는 말씀대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진리를 날마다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지 거의 30년이 되어 가던 때에도 그는 자기 과거를 떠올리며 여전히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1:14).

하나님이 그에게 얼마나 많은 은혜를 부어 주셨는지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주의 은혜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넘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한다면 이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알고자 하는 간절함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식의 대상이 아닙니다. 화석이 된 과거의 인물이 아닙니다.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 자신의 인격이요 형상입니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돼지나 소를 만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돼지가 소는 겉으로 보면 됩니다. 자를 가지고 머리부터 꼬리까지 재어보고, 무게를 달아보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더 이상 알 필요가 없습니다. 돼지는 인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인격적인 것이기 때문에 한번 만나 아는 것으로는 진정으로 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사기꾼이라면 어쩌다 만난 고위층 인사를 들먹이며 잘 안다는 소리를 할 지 모르지만, 정말로 인격으로 교제하기 원하는 자라면 그런 엉터리 같은 소리를 절대로 하지 못합니다.

사람과 사람은 자주 만날수록 서로를 아는 깊이가 깊어집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부터인가 속에 든 생각을 나누는 관계가 됩니다. 나중에는 너나 나나 똑같다고 할 정도로 서로가 일체감을 느끼는 정도까지 발전합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누구를 조금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격적인 앎이요, 교제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알기를 원한다면 인격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인격적 지식은 조금 아는 것으로 머물면 안됩니다. 인간끼리도 진지한 교제는 더 알고 싶어하는 갈증을 일으킵니다. 하물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독생자 예수님을 알고 교제하는 것이라면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이런 찬송가가 있습니다.

내 평생의 소원, 내 평생의 소원, 대속해 주신 은혜를 간절히 알게 원하네

여러분에게 이와같은 갈증이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교제하는 사람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주변에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에 대해 별로 흥미가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신득의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현대 교인들 가운데는 이 말을 오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믿으면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 얻는다고 하니까 한 마디의 신앙 고백이면 만사가 다 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얼마나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까?

다시 말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반응입니다. 그 반응이란 예수님을 더 알고 싶어하고, 은혜를 더 받고 실어하는 욕구를 가지고 주님 앞으로 달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진정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이제부터는 허리띠를 띠고, 등불을 들고 예수님을 알기 위한 새로운 여행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디로 여행을 떠날 것입니까?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5:39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또 그분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간절히 갈망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공부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이 시간 저는 진지하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얼마나 깊이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을 아는 일이 얼마나 관심을 두고 있습니까? 한 가지 속일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마음이 가는 일에는 아무도 시간을 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골프에 미친 사람을 보면 골프 칠 시간이 없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쇼핑하기 좋아하는 부인들은 백화점에 한 번 들어갔다 하면 시간을 잊어 버립니다. 우리가 성경을 펴 놓고, 공부하고, 묵상하는 데에도 이와 같은 자세가 필요합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왜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까? 그들은 예수를 오래 믿었고, 그것도 잘 믿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나중에 예수님을 문 밖에 세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매력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소경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주님을 그들을 향해 이렇게 권고하셨습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계3:19)

무엇을 회개하라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모르면서 아는 체 한 모든 죄를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이 경고는 우리도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몇 년 믿었다고 해서 벌써 예수님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예수를 믿은지 오래되어서 많이 안다는 생각에 설교를 들을 때 그 설교 그 설교라고 은혜를 받지 못하는 분은 계시지 않습니까? 주님은 관심의 대상에서 밀려나 문 밖에 서 계시는데 말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주님의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야 합니다.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21년 10월 3일 오전 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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