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7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1-3
신약 성경에는 네 권의 복음서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입니다. 각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공생애 사역, 십자가 수난, 부활, 승천까지의 예수님의 전 생애에 걸친 사역과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첫 세 권의 복음서, 즉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요한복음과 구분해서 공관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공관복음이란 같은 관점에서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내용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공관복음은 대부분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을 기록하고 있으나, 요한복음에서는 유대에서의 행적을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비유를 주로 기록한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이 갖는 의미에 관한 긴 설교가 나옵니다.
공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메시지의 핵심주제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지만, 요한복음은 영생(영원한 생명)입니다. 또한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공적인 접촉보다 개인적인 대화가 많아 무려 15번이나 대화하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특별히 초신자들이 복음을 가장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복음서, 그 중에서도 요한복음부터 읽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마태복음에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에 이르는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족보는 일차적으로 예수님께서 구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아라는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알려 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구약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이 마태복음부터 읽으면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책입니다. 요한복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며 우리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쉽고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에는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요한복음을 통하여 살아계신 예수님을 체험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그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18절은 요한복음의 서문으로서 요한복음 전체의 축소판입니다. 여기에는 요한복음의 내용이 함축적으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제부터 요한복음 서문을 통하여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1성경에는 태초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1:1"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요일1:1"태초는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실 때의 태초입니다. 그래서 시작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1:1과 요일1:1의 태초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기 훨씬 이전, 다시 말해서 시작이 없는 영원을 말합니다. 온 우주 만물에 시작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분이십니다."
창1:1의"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1여기에서 등장하는 말씀은 신약 성경의 원어인 헬라어로는 로고스라고 합니다. 사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당시에는 로고스라는 말에는 단순히 말씀이라는 의미만 담겨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주전 6세기부터 1세기에 이르기까지 헬라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의 사상을 지배하던 철학이 있었습니다. 로고스는 바로 그 철학의 골자였습니다. 그래서 그 의미를 알든 모르든 간에 로고스 하면 ‘아, 신을 이야기하는 구나’하고 생각할 정도로 누구나 그 개념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심지어 플라톤 같은 위대한 철학자는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어느 날 신으로부터 로고스가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그들은 로고소를 온 우주를 통제하는 하나의 능력이자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는 하나의 초월적인 존재로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로고스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전도할 때 “알지 못하는 신”이라고 써있는 팻말이 붙은 신상을 보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은 그 신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섬겼던 것입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로고스라고 말한 데는 다분히 이런 의도가 숨어 있었습니다. “너희들이 날마다 로고스, 로고스 하는데 그 로고스가 누구인지 내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너희들이 말하는 로고스다”
따라서 요한이 로고스라는 용어를 사용한 배후에는 진리를 용이하게 전달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로고스라는 말을 빌리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요한이 소개하는 말씀, 곧 로고스는 어떤 분이십니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1:1-2말씀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으로서 피조물이 아닌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삼위일체 교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교리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의 신비이기 때문에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면 불완전한 설명만 나올 뿐이므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어야 합니다.
성부 하나님도 하나님이시고, 성자 예수님도 하나님이시며, 성령 하나님도 하나님이십니다. 구약 시대에는 주로 성부 하나님께서, 신약 시대에는 주로 성자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로는 주로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렇지만 어떤 때든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단독적으로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함께 역사하셨고, 지금도 함께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신성,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이단입니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요일2:22-23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이단들은 예수님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피조물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초대 교회에서 이단으로 정죄한 아리우스파의 사상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 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2:6-111절과 2절이 말씀이신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의 관계를 설명했다면, 3절은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온 우주 만물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3우주 만물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통해 생겨났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연히 생겨난 것은 없습니다. 강대상도, 마이크도 모두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물건도 그러한데, 하물며 소우주라는 불리는 인간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하는 것은 불신앙으로 꽉 들어찬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부하기 위해서 하는 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은 진화론자들의 말에 절대로 귀를 기울여서는 안됩니다. 진화론자들은 처음에 우연히 생명체가 생겨났고, 그것이 진화되어 지금에 이르렀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시지 않는 한 인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태초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포한함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창조주이시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모든 것의 존재의 근원이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으며, 우리의 존재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3예수님께서 계시기에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아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 충만을 받으며, 병 고침을 받고, 모든 일에 형통하며, 천국의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하면 우리의 삶 가운데 날마다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우리의 삶이 절망과 슬픔, 고통, 괴로움이었지만,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는 하나님께서 열린 문의 복을 주셔서 모든 것이 새롭고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생활 가운데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건강과 물질, 지혜와 재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일생 동안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한 삶, 언제나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 예수님이면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평생에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영국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유니우스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세계적인 백과사전에서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며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대단한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17세기에 살았던 사람인데, 목사이자 탁월한 고전학자로서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를 지냈던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 역시 목사였습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는 나오지 않지만 기독교 백과사전에서는 그 이름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탁월한 인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탁월한 목사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자녀라면 어려서부터 그 믿음이 탁월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유니우스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어릴 때는 아버지 밑에서 신앙생활을 했지만, 머리가 커지고 학교에 가서 학문을 배우면서 점점 믿음에서 떠났습니다. 결국 나중에는 신앙생활마저 포기해 버리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 아들을 놓고 늘 마음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절대 강압적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고 합니다. 목사 집에서 자녀를 신앙으로 양육하기가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목사인 아버지가 예수 잘 믿으라고 자녀들을 너무 윽박지르면 오히려 빗나갈 확률이 높습니다. 장로 집안도 비슷할 것입니다. 유니우스의 아버지는 상당히 총명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들이 신앙에서 멀어지는 것을 보고 속이 탓지만, 강요하기보다 인내하면서 꾸준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던 중에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아들이 가끔 자기 서재에 들를 때면 늘 찾아가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 신약 성경을 가져다 놓기로 한 것입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내 아들의 눈을 열어 주시면 이 아들이 성경책을 보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기다렸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없을 때 유니우스가 서재에 들어왔습니다. 어떤 생각에 골몰하면서 늘 하던 대로 자기가 잘 가는 그 자리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책이 한 권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심코 그 책을 펴 보았습니다. 요한복음 1장이 나왔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1이 구절을 보는데 뭔가 가슴을 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철학과 논리학을 배웠기 때문에 논증의 구조를 보는 예리한 눈이 있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요한복음 1장의 논증 구조가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야, 이거 대단한데, 간결하면서도 힘이 있고, 군더더기도 없이 핵심을 때리는 3단계 논증을 하고 있구나. 정말 대단한데”라고 생각하며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친김에 그는 1장을 내리 읽어 내려갔습니다. 읽어 갈수록 마음이 자꾸 이상해지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뭐?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이 말씀이 하나님이라고?”
마음이 자꾸 이상해지자 이내 성경을 덮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황급히 서재를 나왔는데, 이상하게 진정이 되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흥분했다고 할까요? 충격을 받았다고 할까요? 아니면 불안했다고 할까요? 무엇인가에 쫓긴다고 할까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감정에 붙들려서 헤어나지를 못했습니다.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도, 심지어 밤을 새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너무 견딜 수가 없어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제가 이제 믿겠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제가 이제 고백합니다.”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순간, 형용할 수 없는 평안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불안하고 초조하던 마음이 폭풍 후의 바다와 같이 잔잔해진 것입니다. 이 체험이 계기가 되어 유니우스는 신학 공부를 시작하여 목사가 되었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습니다.
